“국민 대통합 대통령”이 되겠다는 박근혜 당선인은 미합중국의 대통합을 이룬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지도력을 교훈 삼을 필요가 있다. 링컨은 당내 대통령 후보 경쟁으로 갈라졌던 공화당을 대통합하였고 남북으로 분열되었던 미국을 통일한 지도자라는 데서 그렇다.

그는 먼저 내각을 구성하는 데서부터 포용과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자신과 공화당내 대선 경쟁과정에서 치열하게 대결했던 경쟁자들 중 능력있는자들을 모두 입각시켰다. 그의 내각을 ‘팀 오브 라이벌(경쟁자들로 구성된 팀)’이라고도 한다.

공화당 소속의 링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민주당 출신 3명도 입각시켰다. 그들 중 하나인 에드윈 M 스탠튼 전쟁장관은 한 때 링컨을 “팔이 긴 원숭이”라고 모독한 사람이다. 하지만 링컨은 스탠튼을 복수 대신 포용으로 감쌌다. 국민 대통합을 위해서였다. 윌리엄 수워드 국무장관은 링컨을 얕잡아 보고 내각을 휘어잡아 자신이 실권을 장악할 욕심으로 입각하였다. 그러나 팀 오브 라이벌들은 결국 링컨의 포용력, 높은 도덕성, 친절, 겸허, 감수성, 따뜻한 동정심, 정직, 탁월한 지도력, 등에 감복해 끝내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았고 온건노선을 지켰다. 그는 노예제 확산에 대해선 절대 반대하였지만, 이미 노예제를 합법화한 주(州)들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는 온건 노선을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링컨은 국가안보에 관한한 유화나 타협 없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가 1861년 3월 대통령으로 취임 했을 때 이미 그 보다 한 달 전 남부 7개주는 노예제도 사수를 위해 미합중국(U.S.A)으로부터 탈퇴, ‘남부연방(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정부를 세웠다. 링컨은 남부연방을 막기 위해 가차없이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했다. 그는 미합중국 내 남부연방 동정자들을 체포하거나 남부로 퇴출시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부연방 정부가 남부구역 내 찰스톤 항구에 위치한 북부군 요새 ‘포트 섬터’를 포위하고 그곳으로부터 북부군을 철수시키라고 협박하자 단호히 맞섰다. 당시 각료들 중 수워드 국무를 필두로 한 적지않은 장관들은 포트 섬터에서 철수하자며 유화책을 주장했다.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링컨은 포트 섬터 철수는 남부연방의 독립을 인정, 분단의 영구화를 결과한다며 절대 반대했다. 그는 포트 섬터 철수 대신 그곳으로 군수보급선을 보냈다. 그에 분격한 남부군은 1861년 4월 12일 포트 섬터를 포격,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4년간에 걸친 남북전쟁은 62만50000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링컨의 대통합 의지와 결단은 분단된 미합중국을 다시 하나로 통일 시켰다.
링컨은 남북전쟁 중 휴전이란 없고 오직 남부의 항복 뿐이라고 했다. 항복 아닌 휴전은 분단을 고착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국민의 4년에 걸친 전쟁 피로증으로 자신이 1864년 11월 8일 재선에서 낙선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면서도 휴전을 반대하며 오직 남부의 항복만 요구하였다. 결국 그는 재선되었고 끝내 1865년 4월 9일 남부의 최고사령관 로버트 E 리 장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닷새 뒤 그는 불행하게도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정신질환자인 배우 존 윌키즈 부스의 권총에 맞고 숨졌다.

링컨은 포용의 용병술과 흔들리지 않는 노예해방 신념으로 국민 대통합을 이뤄냈다. 그의 조국 통일의지와 비굴한 유화책 거부 그리고 단호한 결단력은 미합중국을 하나로 다시 묶어 세웠다. “국민 대통합‘을 내세우는 박근혜 당선인이 교훈으로 삼을 만한 훌륭한 포용·신념·결단력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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