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B 사찰에 도둑이 들어 보관중이던 현금과 귀금속을 털어가는 절도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수사를 접수한 경찰은 사건발생 9개월만인 최근 황모(55)씨와 김모(51)씨를 이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 사건 일체를 자백받았다. 그런데 잡고보니 황씨는 전직 조계사 승려였고, 김모씨는 기업체 임원을 지낸 사람이었다. 사건의 전개상 여기까지는 평범한 절도사건쯤으로 지나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황씨 등 범인이 잡히고 난 뒤부터 진짜 흥미로운 부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건 자체보다는 이 사건의 이면에 깔린 내용들이 더 흥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전직 승려 황씨가 B사찰에 침입한 까닭

경찰 조사결과 범인 황씨는 지난 94년 조계사 폭력사태 때 각목을 휘두르는 등 난동을 부려 승려직을 박탈당한 인물이었다. 그 이후 별로 할 일이 없이 지내던 황씨는 우연히 “서울 종로에 위치한 A사찰 주지가 조계종 O총무원장의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귀가 솔깃한 황씨는 이 비자금을 훔치기 위해 기업체 임원 김모씨 등을 불러 모았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서울 신길동의 한 여관에서 합숙까지 해가며 범행에 사용할 승용차 등을 준비했다. 주지를 미행해 현장 답사도 마쳤다. 며칠 후 이들은 B사찰 주차장에서 주지를 흉기로 위협해 손발을 묶은 뒤 집안을 뒤져 금품을 훔쳤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수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사찰 입구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고장이 나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절에 왠 비자금?

이 사건과 관련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사찰에 무슨 비자금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평범한 중생들이야 모를 일이지만 황씨 등 범인들은 분명 “B사찰에 비자금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범행을 저질렀다. 범인 황씨는 경찰에서 “모 큰 스님의 비자금을 A사찰이 대형 금고에 넣고 관리한다는 얘기를 소문으로 듣고 찾아가보니 진짜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수사 결과 이들이 범행현장에서 턴 금품은 현금이 290만원이었고, 나머지는 고가 귀금속이었다고 한다. 경찰이 밝힌 A사찰의 도난 품목 리스트에는 티파니 다이아몬드 손목시계(5,000만원 상당)를 포함해 바쉐론콘스탄틴 손목시계(1,100만원), 다이아몬드 넥타이핀(400만원), 사파이어 반지(200만원), 골프회원권(3억3,000만원) 등 29억원 상당이라는 것. 문제는 황씨 등이 턴 도난 품목이 비자금이냐는 부분. 일단 조계종측이나 도난 당한 A사찰측은 함구하고 있다. A사찰 관계자는 “(주지스님이) 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몸이 극도로 나쁘다. 현재 외부에서 요양 중이며 외부통화는 힘들다”며 언급을 피했다. 조계종 본부도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조계종 관계자는 “A사찰 문제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뭐라 말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사라진 29억대 귀금속의 행방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수사를 맡았던 경찰이 당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해자(범인)보다 피해자(A사찰)가 더 언론에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데는 사연이 있다. 우선 경찰이 범인들로부터 압수한 물품에는 소위 ‘돈 되는 물건’이 전혀 없었다. A사찰은 사건 발생 당시 경찰에 티파니 다이아몬드 손목시계, 바쉐론콘스탄틴 손목시계, 다이아몬드 넥타이핀, 사파이어 반지 등을 도난 당했다고 신고했다.그러나 경찰이 범인으로부터 압수한 물품에는 이것들이 모두 빠져 있었다. 대신 황씨의 집에서 압수한 차용증서, 영수증, 그림감정서 등 ‘돈 안되는’ 물품이 전부였다.

말하자면 ‘돈되는 물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피의자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전했다. 사건 담당 경찰 관계자는 “하수인 손아무개씨는 ‘절에서 훔친 금품을 보자기에 담아 황씨에게 전해줬다’고 하지만 황씨는 ‘이를 받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경찰은 결정적인 물증인 도난품목을 뺀 채 진술조서와 압수 문서만을 검찰에 송치했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A사찰측도 도난품목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는 점. 경찰 관계자는 “사건내용과 도난품목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A사찰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면서 “현재로서는 피해자와 관련된 사항은 일체 말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전 감찰부장 가모씨 “조계종 비자금일 것”주장

큰 돈을 관리한다는 얘기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번 사건과 관련해 조계종 감찰부장 출신인 가모씨는 다른 의견을 제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는 이번 사건에 연루된 금품들에 대해 “출처 여부를 떠나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A사찰 주지가 모 큰스님 돈을 관리한다는 얘기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라면서 “모 큰 스님 재산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도난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가씨가 감찰부장 재직 당시 확인한 숨겨진 일화 한 토막. B사찰 주지인 S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로부터 거액의 수표를 받았다는 것. 그러나 그는 이 수표를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냐”며 그 자리에서 내동댕이쳤다. 당시 이 일화는 아직까지 조계종 내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총무원장 선거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50억원, 서울 종회의원은 3억원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다. 얼마짜리 총무원장, 얼마짜리 종회의원 등의 비아냥거림이 나돌 정도”라면서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재직 당시 경험한 일이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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