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사정 관계자, 국정원 직원 등을 사칭하며 은행으로부터 73조원에 이르는 거액을 빼내려던 일당이 경찰에 구속됐다. 특히 이번 범죄에는 현직 농협 지소장과 모 은행대리가 거액을 미끼로 범죄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하고 있다. 경찰은 유사 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 중에 있다.천문학적인 액수로 ‘희대의 사기꾼’이 될 뻔했던 10명의 일당들이 범행을 모의하게 된 것은 작년 초. 교도소에서 알게된 배 모(59·무직)씨와 정 모(40·무직)씨는 출소 후 의기투합하게 됐고 ‘고심 끝에’ 은행을 상대로 한 범죄를 모의하게 됐다. 배씨와 정씨는 범죄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알고 지내던 신 모(63·자영업)씨를 끌어들였다.

이들은 서울 용산구의 신씨 집에서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이 과거 정권의 비자금을 세탁한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며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게 됐다.사건의 주동자인 이들 세 명은 먼저 인터넷 위조 사이트에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고, 청와대 기념 배지 등을 토대로 청와대 마크가 찍힌 은행통장 사본을 제작했다.이어 이들은 은행원을 포섭하고 각본대로 움직여 줄 ‘행동대원’을 뽑기로 결정했다. 자금책인 신씨는 “통장안에 역대 정권의 비자금 6조 9,300억원이 들어 있는데, 은행 전산망을 이용해 교환, 세탁하면 거액을 사취할 수 있다. 입금액의 80%는 국가에 귀속시키고 10%는 총 책임자 세 명이 갖고, 나머지 10%를 대가로 주겠다” 며 행동대장 김 모(40·무직)씨를 비롯 행동대원 5명을 추가로 영입했다.

이에 행동대원 김씨 등은 서울 모 은행의 임모(34) 대리에게 접근 “비자금 세탁이 성공할 경우 사례비조로 20억원을 챙겨주고 재정경제부 과장직에 특채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해 주겠다” 며 현직 은행원을 포섭하기에 이르렀다.임씨는 일당의 주문대로 9,900억원권 자기앞수표 7장을 발행하고, 은행 컴퓨터 전산망을 허위 조작해 일당들이 개설한 개좌로 입금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임씨는 실제로 통장에 돈이 들어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거액이 오고간 전산거래 내역을 수상히 여긴 은행측의 거래 취소로 범죄 시도는 미수에 그치게 됐다.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행동대장 김(40)씨는 지인인 경북안동 농협의 박 모 지소장을 끌어들여 제 2의 범행을 기도했다.

이들 일당은 박 지소장이 거래전표 조작 등의 방법으로 이체해 놓은 가공의 돈 66조원을 타 은행 계좌로 다시 옮기는 방식을 택했다.행동대장 김씨는 박 지소장에게 “청와대 비자금 66조원이 있는데, 인출이 순조롭게 마무리될 경우 재경부나 금감위 등 정부 금융 관련 부처 고위직으로 옮겨 주고 거액의 사례금도 주겠다” 며 은행원 임씨에게 사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당시 농협 몰래 서울에서 노래방 체인점을 경영하다 1억 5,000만원 상당의 큰 빚을 지게 된 박씨는 빚을 갚기 위해 일당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다.박씨는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점심시간, 퇴근시간 등을 이용해 거래전표 등의 서류를 허위로 작성해 실체가 없는 돈을 만들어낸 후 거래전표를 허위로 작성해 한번에 2조원씩 모두 33차례에 걸쳐 총 66조원을 이체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일당의 사기행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부 행동대원들의 무모한 납치극으로 경찰에 덜미가 잡힌 것이다.‘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사기사건에 연루된 은행직원 임씨가 사례금을 받기 위해 일당을 만나던 중 사기행각에 빠진 사실을 뒤늦게 알고 범행을 폭로하려 했고, 이에 당황한 일당은 임씨를 주동자 신씨 자택과 인근 여관에 4일간 감금한 채 “국정원 직원을 불러 권총으로 쏴 죽이겠다” 고 협박한 것으로 밝혀졌다.결국 이들 일당은 나흘간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귀가하지 않은 임씨 가족의 실종신고를 받고 추적에 나선 경찰에 붙잡혔고 청와대 마크가 찍힌 통장사본을 소지한 점을 수상히 여긴 경찰의 집요한 추궁을 받는 과정에서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의 전모가 드러났다.

또, 임씨의 옷에서 박 지소장의 명함이 발견됨으로써 농협 계좌 불법이체 사건도 드러나게 됐다. 청와대 사칭 사기가 미수로 그치자 행동대장 김씨가 박 지소장을 신씨의 용산 집으로 불러 들였고 농협 불법 이체사건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임씨와 박씨가 서로 명함을 건넨 것으로 밝혀졌다.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이들이 이번 사건 외에도 유사한 수법으로 사기 행각을 더 벌였을 것으로 판단, 추가 조사에 착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배씨 일당이 CIA 요원 행세를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수협 모 지점에서 휴면계좌 잔고로 UN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며 2조원을 인출하려다 실패한 전력이 있는 만큼 유사 범죄 여부를 조사 중” 이라고 전했다.경찰은 달아난 범행 총 지휘자 정 모씨와 행동대원 김 모씨의 행방을 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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