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연휴를 일주일 앞둔 지난 3일 밤. 기자는 두달여만에 다시 청량리 집창촌을 찾았다. 연휴를 앞두고 인근 백화점과 길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홍등이 켜진 집창촌 골목은 오가는 사람없이 한산했다. 아가씨들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 오히려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는 가수가 꿈이었다는 한 성매매 여성을 만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8년째 집창촌에서 일하고 있는 애리(31·가명)씨는 서른이 넘은 나이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만큼 동안에 빼어난 미인이었다. 인기가수 C양을 닮은 그는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내 경계를 풀고 싹싹하게 기자를 맞아주었다.

몇마디 인사를 나눈 후 그는 “내가 살고 있는 방 구경할래요?”라며 자기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업소내부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그가 거주하는 방이 나왔다. 대부분의 아가씨들이 따로 방을 얻어 출퇴근하고 있는 추세지만 그는 청량리 업소에 따로 마련된 숙소에서 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아지 두 마리가 반겼다. 제법 넓은 욕실이 딸려있는 그의 방은 4~5평 정도 크기로 깔끔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영업을 해야할 시간이었지만 그는 “목요일은 손님이 유난히 없다”며 아예 가게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 화장을 완전히 지운 맨얼굴에 청바지를 입은 수수한 모습으로 가게문을 나섰다. “외출할 때는 항상 화장을 지운다”는 그는 “화장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인생은 상처뿐”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자 애리씨는 자신의 삶을 털어놨다.그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누구나 한번씩 다시 돌아볼만큼 곱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가 살아온 삶은 너무나도 파란만장했다.“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안겪어본 일이 없다”는 애리씨.그는 “내 얘기를 글로 풀어내면 책 몇권은 족히 나올 것”이라며 담담히 자신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지나간 날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감정이 북받치는지 간간이 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경기도에서 태어났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 정확한 출생지조차 모른다.”그는 어린시절부터 경상도 지역에서 자란탓에 억양이나 말투에서는 여전히 경상도 말씨가 남아있었다.

고아가 된 애리씨와 그의 형제들은 어린시절을 큰댁에서 보냈다. 그러나 큰댁에서의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부모없는 아이라는 주변의 무시와 그로 인한 설움, 큰엄마의 폭행과 구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린 그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고통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친오빠들이 그를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큰 오빠는 그의 몸에 심한 집착을 나타냈다.“직접 관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친오빠들이 내 몸을 만지고 더듬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다.”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정붙일 곳 하나 없어 방황하던 그는 급기야 중학교를 중퇴하고 지방의 티켓다방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의 나이 불과 15살 무렵이었다. “지방에서 일할 때 강제로 윤락을 강요하고 이곳저곳으로 여자를 팔아넘기는 악덕포주들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그는 여수의 한 티켓다방에서의 경험에 대해 털어놓으면서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몸서리를 쳤다. 애리씨는 돼지우리와도 같은 좁고 지저분한 쪽방에서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했음에도 정작 그가 손에 쥔 돈은 없었다고 한다. “온갖 쌍욕을 듣고 무자비하게 맞아가면서 ‘개처럼’ 일했다. 하루에 너무 많은 손님을 받아 몸이 망가지고 걸을 수조차 없는 지경이어도 포주는 강제로 손님을 받게 했다.”

내 인생에도 햇살이

친한 친구도 거의 없다는 애리씨와의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됐다.경상도와 전라도, 제주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거쳐 마지막으로 청량리에 정착하게 된 애리씨. “서른해를 살아오면서 참 험한 일을 많이 겪었다. 어떻게 살아왔나 싶을만큼 고달프고 험난한 삶이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달팠던 탓에 스스로 자신의 동맥을 끊어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그는 고통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한때 필로폰에 손을 대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애리씨가 마약으로 인해 조사를 받고 구속될 때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형제들도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애리씨의 원래 꿈은 가수였다. 비록 지금은 경제사정상 청량리를 떠날 수 없지만 그에게도 작은 소망이 있다. 빨리 돈을 모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빼어난 미모와 싹싹한 매너로 얼마전까지만해도 청량리에서 ‘잘나가는’여성이었다. 그러나 작년 가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성매매법으로 도무지 손님이 없다. 그나마 있던 단골도 전화만 올뿐 발길이 끊겼다”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애리씨는 형편상 결혼식은 못올렸지만 혼인신고까지 한 남자가 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힘들고 고달픈 그의 인생을 버틸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사람이라고 한다. 현재 일주일에 한번씩 마약으로 복역중인 남편의 면회를 다녀오면서 그가 출소할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는 애리씨는 “설에 갈 곳도 없다”며 쓸쓸히 웃었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내 인생에도 햇살이 비치겠죠”라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다시 삶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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