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피해자 접수를 시작했다. 접수를 시작하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진상규명위원회를 찾았다. 진상규명위원회를 찾는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당한 피해와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6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워지지 않은 그들의 상처,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징용자들을 통해 그들이 사지에서 겪은 생존기를 들어보았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정기호)가 피해자 접수를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세안빌딩 9층에 위치한 진상규명위원회 민원실에는 갖가지 서류를 들고 온 이들로 북적였다. 이날 이곳을 찾은 이들 중에는 80세를 넘긴 고령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 때 강제 징용돼 생사를 오가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이들 외에 이곳을 찾은 다른 이들은 모두 직계 가족들 중 피해자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올해 예순 두 살 된다”고만 밝힌 한 여성은 “일제에 징용돼 전사하신 아버지에 대한 보상을 받으러 왔다”면서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징용돼 전사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양군도에서 전사하셨다는 통지를 받고는 오래지 않아 재가하셨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의 고통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일제 당시 병적 기록부를 꺼내들며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는 고사포 부대에 근무하다 부대가 폭격을 맞아 전멸했다고 돼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끝까지 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 계시리라 믿었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이어 이 여성은 국가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떨린다”고 말했다.이처럼 진상규명위원회를 찾는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하나 같이 한편의 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가슴 저리고 극적이다.

특히 징용이나 징병으로 직접 끌려갔다 온 고령자들의 사연은 더욱 그렇다.44년도에 17세의 나이로 징용된 이천구(78)옹도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긴 끝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옹은 “나는 3,000여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갔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옹은 “당시 남양군도로 보내졌던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 제철소에 근무하게 됐다. 그곳은 이름만 제철소였지 각종 무기와 탄약, 선박, 탱크나 비행기 부속품 등도 생산했던 곳이었다”고 말했다. 이옹에 따르면 이 제철소 단지는 그 규모가 4㎞에 이르는 동양 최대 규모의 제철소였다. 이 제철소는 전략적으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인데다 규모 또한 엄청나서 수시로 연합군에 의해 폭격을 맞아야만 했다.이옹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없다. 수 십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뒤덮더니 수백 개의 폭탄이 쏟아졌다. 하루에 두 번 세 번 폭격이 이루어진 적도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들이었다”고 전했다.

이옹에 따르면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옹은 “전쟁이 끝나도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며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며 “나도 당시 ‘내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구나’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천에 널린 시체 치우는 일을 하면 조선으로 가는 배의 승선권을 준다는 말을 듣고 시체 치우는 일을 했다. 그렇게 시체 치우는 일을 한 끝에 겨우 승선권을 얻어 고국으로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이옹에 따르면 죽은 사람들을 딱히 처리할 방법이 없어 바다에 그냥 던지거나 폭탄이 터지면서 생긴 큰 구덩이에 시체를 매장했다. 이옹은 이에 대해 “당시 시체 치우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잠을 이룰 수 없다”며 머리를 저었다.

이옹은 “폭격으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체는 물론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까지 치우며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고 말했다.일제에 강제 징용됐던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고 말한다. 이옹은 “중국에서 가져온 콩 찌꺼기와 동남아서 가져온 쌀을 섞어 찐 것 150그램과 단무지 몇 조각 그리고 일본식 미소 된장국이 식사의 전부였다”고 전했다. 이옹은 또 당시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미군포로에 대해서도 말했다.이옹에 따르면 수용소에 있던 미군들은 살인적인 강제 노역에 시달려 하루에도 죽어나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조선인들은 미군에게 동정심을 느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그들에게 담배나 먹을 것을 은밀히 전해 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제에 징집 윤모옹 “미군 폭격에 몇차례 죽을 고비 넘겨”

21살 때 강제 징병돼 생사를 넘나들며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는 윤모(83)옹.종로 토박이라는 윤옹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또렷하게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1944년 9월 마을의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제히 징집명령이 내려졌다. 일제의 강제 징집 명령에 마을 전체가 초상집으로 돌변했다. 윤옹은 징집된 다른 이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 육군 제 47부대에서 한달 간 기초군사 훈련을 받았다. 윤옹에 따르면 당시 같이 훈련을 받았던 이들은 모두 2,000여명이나 됐다. 기초 훈련이 끝난 뒤 윤옹은 부산항으로 다시 이동, 이곳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로 보내졌다.윤옹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일본서 해방이 될 때까지 약 6개월 간을 근무했는데, 전쟁막바지에 패색이 짙은 일본을 미군이 한창 밀어붙이고 있을 때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폭격기들이 몰려와 폭탄을 쏟아 부어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겼다”고 전했다.

윤옹은 이어 “어느 날 폭격기 30여대가 부대를 폭격했다. 폭격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로 인해 하루사이에 우리 부대에서 300여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윤옹은 “그 날 폭격은 저녁 8시경에 일제히 이루어졌는데, 미군은 이날 폭격을 수 일전에 미리 포고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폭격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은 다름 아닌 배고픔이었다. 굶주림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졌다. 윤옹은 “우리 마을에서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징용됐는데, 내 기억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몇 명 안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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