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8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이모(49)씨를 특경가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구속된 이씨가 모 대기업 회장의 전처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씨의 구속사실이 알려지면서 재벌가 사모님에서 사기꾼으로 전락한 이씨의 사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에 검찰 구속영장을 통해 이씨 사건의 전모를 들여다보았다.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1996년 8월 서울 S백화점을 찾아가 “여당 국회의원과 부산영화제 참석 귀빈들에게 선물로 줄 상품권이 필요하다. 계산은 나중에 하겠다”고 말한 다음 이 백화점 상품권 5억3,000만원 어치를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는 또 같은 해 10월 “내가 주최하는 국제행사에 참석한 귀빈들에게 줄 선물”이라며 보석상 이모씨로부터 사파이어 반지 등 8억800만원 상당의 보석을 먼저 받은 뒤 값을 치르지 않은 혐의와 11월 D산업 대표이사 심모씨로부터 19억여원의 약속어음을 빌려 쓴 다음 이를 갚지 않은 혐의도 각각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대기업 회장의 사모님이라는 사실만으로 수십억원에 달하는 금품을 조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검찰의 구속영장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지난 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는 특정직업도 없이 은행부채가 무려 15억여원에 이르러 그 이자를 지급하기에도 급급한 상태였다. 검찰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각종 사회활동을 계속해온 것으로 드러났고, 이씨가 백화점을 상대로 수 억원을 가로챈 이유는 바로 이 사회활동 때문이었다. 이씨는 96년 8월, 같은 해 10월 자신의 주도 하에 서울의 H호텔에서 개최될 국제문화재단 창립총회 행사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씨는 행사를 개최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씨는 자금 마련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 최모씨, 노모씨와 함께 일을 도모했다.

이씨 등 3명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 회장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면 특별한 담보 없이도 상품권 등을 구입할 수 있는 것에 착안, 이를 이용해 상품권을 외상으로 구매한 뒤 다시 이를 덤핑으로 되팔아 자금을 마련키로 하고 작업에 착수했다.검찰 조사에서 드러난 이들 계획에 따르면 최씨와 노씨가 상품권의 덤핑판매를 담당하여 약 30억원 정도를 조성한 뒤 일부는 이씨의 부채 15억원과 그 이자를 변제하고 일부는 행사비용과 생활비에 충당했다. 나머지는 최·노씨가 유통회사 설립자금으로 쓰기로 모의한 것으로 드러났다.이에 서울의 S백화점을 찾은 최씨는 당시 백화점 직원 장모씨에게 자신을 “G산업회장 아들로 현재 S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소개하며 자신의 변제능력을 은근히 과시한 뒤 “신한국당 의원들에게 로비용으로 쓸 상품권을 사용하려하니 S백화점에서 이를 납품해 주면 한달 후에 대금의 절반, 두 달 후에 나머지 절반을 현금으로 결제하겠다”고 속였다.

최씨는 또 자신이 제주도에 R호텔을 건립하고 있는 중이라 말하기도 했다. 검찰의 확인 결과, 최씨가 G산업회장 아들이라는 사실은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엄청난 고객을 만난 듯했던 장씨는 96년 8월 6일 2억 3,000만원 상당의 상품권 2,300매를 챙겨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이씨의 집을 찾았다. 이날 이씨와 만난 장씨는 이씨로부터 “반드시 약속한 날짜에 돈을 주겠다”는 확답을 듣고 그 자리에서 상품권 2,300매 전부를 넘겼다.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또 같은 해 9월 20일에도 “개인적으로 부산영화제에 참석하는 귀빈들에게 선물용으로 사용할 것이니 10만원권 상품권 3,000매를 달라”며 3억원 상당의 상품권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이들의 사기행각은 마치 탄력이나 받은 듯 계속됐다.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96년 10월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모 룸살롱에서 보석상 이모씨에게 “국립문화제단에서 주최하는 세계영상문화재단 창립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스페인 국왕 및 그 수행원 등 귀빈들에게 선물용으로 보석을 교부하려한다”며 “보석을 제공하면 그 대금을 약속어음으로 지급하고 결제기일 내에 반드시 변제하겠다”고 속여 며칠 후 서울 H모 호텔 17층 객실에서 노란 사파이어 반지 11.43 캐럿 1개 등 시가 2억 9,000만원에 해당하는 보석 4개를 건네 받았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이뿐 아니라 수일 후 다시 보석상 이씨로부터 보석 23개와 시계 1개 등 8억여원 상당의 금품을 건네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이 여인은 누구?

금전관리 취약해 별거, 끝내 파경미국 명문 음대를 졸업하고 한때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한 이씨는 ‘재벌가의 여인’이 되면서 재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후 이씨는 세계음악협회와 세계미술관장협회의 이사로 선출되는 등 국제 예술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세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이씨는 금전관리에서 취약함을 드러냈다. 수십억원의 빚 때문에 남편과 사이가 나빠진 것. 결국 하루가 멀다하고 잦은 트러블을 일으키던 이들 부부는 별거하다가 1998년 결국 파경을 맞았다. 검찰 관계자는 “엄청난 빚을 진 채 별거 중이던 이씨가 재벌그룹 회장의 부인이란 ‘간판’을 이용, 자금조달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에 검거될 당시 이씨는 일정한 주거도 없이 남의 명의로 된 휴대전화를 써가며 수 년째 도주 중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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