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당하고 나서야 ‘내가 왜 그랬을까’라고 후회하죠. 당시에는 철썩 같이 믿다가….” 청와대 인맥을 사칭한 사기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번엔 군 핵심기관인 기무사 장교까지 사기행각의 희생양이 됐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자신을 대통령 후원자인 P그룹 C회장의 수양딸이라고 속인 뒤 “평소 친분이 있는 현 정권 실세를 통해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겠다”며 기무부대 소속 K(45) 중령으로부터 거액을 받아 챙긴 보험설계사 권모(여·39)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권씨의 황당한 사기행각 전모를 파헤쳤다.경찰에 따르면 기무사 장교들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인 권모씨는 충북의 모 부대 앞에서 보신탕집을 운영하던 가정주부. 권씨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며 군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나, P 그룹 C 회장 수양딸’

피해자 K 중령도 2001년 9월 경 권씨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K 중령은 지역 유지였던 권씨의 오빠가 “내 동생이 모 부대 앞에서 음식점을 한다”는 말을 듣고 권씨의 식당을 찾은 것. 그러나 K 중령을 알게 된 권씨는 자신을 철저히 위장했다. 권씨는 K 중령에게 자신을 “대통령과 정·관계 인사들을 잘 아는 P 그룹 C 회장의 수양딸”이라고 소개한 것. 또 대령 진급의 마지막 기회를 노리던 K 중령에게 “내가 청와대에 힘을 써 승진시켜주겠다”는 허세를 부렸다. 권씨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C 회장이 자신에게 보낸 핸드폰 메시지 등을 보여주고 ‘C 회장이 자신에게 부동산 등 많은 재산을 줄 것이다’며 온갖 감언이설로 K 중령을 속였다. 결국 별다른 의심없이 K 중령이 자신을 철저히 믿자 권씨는 감추었던 속내를 드러내며 주식투자를 명분으로 돈을 요구했다.

경찰에 따르면 권씨는 K 중령에게 “P 그룹의 주식을 사면 3∼4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며 2년 간 무려 30여 차례에 걸쳐 3억 1,000만원을 가로챘다. 권씨는 지난해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노무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C 회장이 대통령의 후원자다”,“대통령 부부와 친한 사이다”며 전 보다 한 술 더 뜬 감언이설로 K 중령을 속였다. 실제 권씨는 청와대와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청와대 들어갔다 왔다”는 핸드폰 메시지와 인근 PC 방에서 C 회장 명의의 ‘king0000’이라는 아이디를 만들어 K 중령에게 수시로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5월에는 ‘대통령 취임 100일 기념 하사품’이라며 무궁화와 태극 문양을 넣은 순금열쇠를 K 중령에게 건네주었다. 권씨는 자신이 직접 금은방에 의뢰해 제작한 시가 25만원 상당의 5돈 짜리 순금 열쇠를 “대통령이 직접 권 중령에게 건네주라고 했다”는 말을 하며 선물했다.

군 내부 동향 문건까지 건네 받아

경찰조사결과 권씨는 돈을 갈취했을 뿐만 아니라, 군 내부의 동정도 보고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올 초 “청와대 비선라인으로 보고한다”며 K중령으로부터 A4용지 7∼8매 분량으로 정리된 군 관련 비리사례·동정 등을 5∼6차례 건네받는 대담함도 보였다. 권씨는 이 중 일부를 모 잡지에 제보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C 회장 명의의 E 메일을 통해 “K 중령, 자네 지난번에 보고해준 문건 잘 썼네. 청와대에서 잘 받았다고 그랬다”는 내용까지 보냈다. 권씨는 또 마치 대통령이 K 중령을 아끼는 듯한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중이던 때, C 회장 명의로 “대통령이 미국 갔다 돌아오면 자네가 할 일이 더 많을 걸세”라는 내용의 메일까지 보냈다. 그러나 권씨는 이 일이 빌미가 돼 꼬리가 잡혔다.

문건을 만든 K 중령이 내부 감사에서 그 사실이 드러나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은 것. K 중령은 권씨에게 이같은 사실을 전하고 ‘윗 선에서 힘을 써주라’고 부탁했다. 이에 권씨는 “청와대에서 얘기하면 잘 될 것이다”고 K 중령을 안심시킨 뒤 3차례나 직접 기무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씨는 당시 청와대 모 비서관의 이름을 사칭, 기무사령관에게 “K 중령이 어려운 모양인데 도와주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기무사령관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권씨의 거짓 전화는 기무사령관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권씨가 사칭했던 모 비서관을 만나면서 들통났다. 해당 비서관이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한 것. 이에 기무사령관은 권씨의 3번째 전화가 오자 “당신 도대체 누구냐”며 버럭 화를 냈고 권씨는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다. K 중령도 권씨의 전화가 자신의 징계를 풀지 못하고 투자했던 돈도 돌려주지 않자 뒤늦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K 중령은 즉각 청와대에 진정을 냈고 권씨의 황당한 사기행각은 끝을 맺었다. 경찰 조사결과 권씨는 청와대나 P 그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저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다. 특수수사과 관계자는 “P 그룹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자, 권씨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인물로 드러났다”며 “권씨는 식당 운영도 실패해 보험설계사를 하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한편 권씨는 비록 중학교 졸업에 불과했지만 회사내에서 월수입 랭킹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화술과 수완이 뛰어났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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