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직후 3군단장 때 시찰 나선 대통령 납치해 하야시킬 생각이후 74년 9월 건설부 장관으로 사령장 받는 날 등 3차례 시해계획“72년 박정희 대통령을 납치해 하야시키려고 했으며, 이후에도 3차례에 걸쳐 시해할 계획을 세웠다”. 지난 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의 옥중 수양록의 내용이다. 24년만에 빛을 보게 된 이 수양록에서 김 전부장은 10·26사건은 “7년여의 준비 끝에 이뤄낸 혁명으로 유신독재를 청산하기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했다. 수양록의 원문을 요약해봤다.김 전부장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수양록은 대학노트 32쪽 분량으로 80년 1월21일부터 열린 군사재판과정과 10·26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 그리고 수형생활을 하며 느낀 심경 등을 기록한 것이다. 김 전부장은 “유신체제로 지탱하고 있는 박 대통령만 제거하면 다른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최소의 희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10·26사건을 평가했다.다음은 한국일보가 제공한 김 전부장의 옥중수양록의 전문 중 요약분.

<1월21일>

제2심 고등군재(군사재판)가 내일로 다가왔다. 제1심에서의 기록이 정확히 남아야 한다. 역사의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사가 되기 때문이다. 항소 이유서가 제출되기 전에 고등군재 일자 통보를 받고 이미 이 군재는 기대할 것 못 된다고 생각, 단념한다. 불도에 귀의하여 마음에 평온을 찾았다. 육신을 어떻게 다루든 알 바 아니다. 마음의 본성은 공(空)이다. 본성만 확고히 잊지 않으면 세상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강(신옥)변호사가 최종적으로 면담 마치고 갔다. 보안사 요원들이 항소 포기 시키기 위해 공작하고 있다는 것 전달하고, 국방부 기무 정승화 대장 기소를 위한 심문에 응함.

<1월24일>

음력 12월22일 8시반. 영원한 평화를 찾는 날 꿈의 계시?고등군재 제2일째 14.00 출정.고등군재 심리로 이제 언도 공판이 남았다. 매사는 끝났다. 재판장 윤흥정 장군, 성의껏 해주었다. 법무사 검찰관 성명은 부지나 예의도 지켰다. 유한이 없다. 부처님께 서원한다. 박선호, 박흥주 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

<1월27일>

1972.10 유신과 더불어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는 아무 까닭없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영구집권을 위해서 말살되고 말았다.혁명. 나는 1972.10 유신 직후 제3군단장으로 복무하면서 헌법을 보았다. 몇차례고 보았다. 그러나 이 헌법이 아무리 보아도 민주 헌법이 아니고 그 목적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격분했고, 박 대통령이 한없이 미워졌다. 당장 옆에 있으면 주먹질을 할 정도로 미워졌다. 이 때 나는 생각했다. 이 목숨 하나 바쳐서라도 이 자유를 회복해야 하겠구나 하고. 그 해 신체제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은 전방 군단 연말시찰을 했다. 나는 이 기회에 대통령을 납치, 하야시킬 생각을 하고 준비를 했다. 군 영내에 깊숙이 들어 온 이상 얼마든지 가능했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대통령을 맞았으나 차마 결행할 생각이 우리들의 정리 때문에 일어났다 사그러지고 일어났다 사그러지곤 했다. 결국 못하고 말았다.

자신을 졸장부로 생각, 비웃었다.그 후 다음 해인 1973. 3 생각지도 않던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본인 의사도 물음이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알려 왔다. 본인은 군인으로 좀 더 봉사하겠다고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리하여 30년 군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49세에 예편했다. 생각하면 고생도 되었으나 보람도 있었다.국회의원 생활 10개월쯤 되어 중정 차장으로 발령되어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중정 근무를 했다.중정 근무 당시 민청학련 사건을 위시하여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본인은 민주화 운동과 통제에 도전하는 정당한 주장자들을 처벌하는데 나의 양심과 직책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했다. 나는 항상 주장했다. 소수로 처벌대상을 추리라고, 그러나 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때로는 혼자서 격분도 해 보았다.나는 밉고 미운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여하히 해야 하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독재는 박 대통령 각하 혼자서 지키고 있으며 나머지는 그저 따라 하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우리 국민들 전체도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누가 여하한 방법으로 유신독재 체제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고 사방을 돌아 보았으나 그러나 아무도 용기를 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수 없구나 내가 하는 방법 이외에는. 이리하여 1974. 9. 14일 건설부 장관으로 사령장을 받는 자리, 청와대 접견실에서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방법을 결심하고 당일 나는 권총을 몸에 품고 입장했다.그러나 막상 결행하려고 하니 또 인정이 나를 가로막았다. 불발로 마치고 서글펐다. 자신의 못남을 뉘우쳤다. 그러다가 해는 바뀌어 다음 해인 1975. 2 연두순시 때 건설부에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다. 나는 그 날도 완전한 준비를 해 놓았다. 또 마찬가지로 용기부족과 인정이 나를 막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유서와 태극기를 모두 불태우고 말았다.

그 후 1976. 12. 4 돌연 대통령께서 집무실로 부르셔서 집무실로 갔더니 중정부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인은 좋다 그러면 이제는 순리적 방법으로 대통령을 설득하여 유신체제를 고쳐보자, 절호의 찬스다. 이렇게 생각하고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탐색하는 데 노력했다.그러나 조금도 틈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미련스럽게 틈만 있으면 슬슬 완화해보시도록 이야기해 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국내 여론은 물론 혈맹의 우방 미국이 우리나라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자유 우방이 우리에 대해서 인상이 좋지 않다는 것 등.그러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아 나는 이제 다 틀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혁명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 1979. 4 혁명을 결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미루다가 10. 26 드디어 결행하고 말았다.

<혁명의 목적>

1. 자유 민주주의 회복 2. 국민의 희생을 더 이상 없애고, 예상되는 불행을 예방한다 3. 적화를 예방한다 4.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국방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 외교면에서 호혜의 이익을 도모한다 5. 국제적으로 독재국가라는 낡은 이미지를 씻고 한국민의 명예를 회복한다.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유신 체제로 지탱하고 있는 핵인 박 대통령 각하만 제거하면 다른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최소의 희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혁명의 성공>

10.26 혁명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 이는 마치 자유가 흐르는 강을 가로막고 있는 보를 절개해서 물을 흘려 보내는 것과 같다. 이제는 천하 누구도 이 자유의 물결을 가로막을 자는 없다. “이는 천명이요. 대자연으로의 섭리이다.”

<국민들에게>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자유가 병들었던 것도 우리의 노력부족과 무관심에서 빚어졌습니다.우리는 자유가 없어지고 나서 그 귀중함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암흑의 사회로 곧 지옥입니다. 자유는 남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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