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시 이태원, 삼각지, 용산로 등에 걸쳐 있는 주한미군의 주요 군사시설 지역이다.이곳은 주한미군사령부와 미8군사령부가 광복 이후부터 주둔하면서 ‘용산공화국’, ‘용산합중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국방부, 국방부조달본부 등과 인접한 용산 미군기지는 100만여평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예로부터 수도 진입 관문과 교통의 요지로 통했던 용산에 큰 면적의 군사기지가 자리 잡고 있어 교통소통 장애는 물론 지역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이에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 필요성이 대두됐고 지난 1988년부터 용산기지 이전 문제가 거론됐다. 2004년 7월에 열린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에서 용산 미군기지는 2008년 12월 말까지 경기도 평택시로 이전을 완료하기로 했다.

슬픈 역사를 지닌 용산기지700여년간 외국군에 넘겨져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며 강남과 강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인 용산. 그곳에 자리한 미군기지의 터는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용산은 주로 군사기지로 사용됐었다. 그러나 그 군사기지는 외국군대의 기지였다. 즉 용산은 아주 오래전부터 외국군대의 손에 넘겨져 있었던 것이다. 용산의 외국군대 점령은 7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3세기 말 고려를 침략했던 몽골군이 병참기지를 세운 곳은 용산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도 왜군은 용산을 군사기지로 이용했다. 왜군은 용산에 보급기지를 설치하고 운영했는데 그곳은 지금의 효창공원 근처이다.

당시 평양에서 남쪽으로 퇴각한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명나라 군대와 교섭을 벌인 곳도 용산미군기지 터로 알려져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며 대원군을 체포, 압송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이 용산에 자리를 잡고 군용지로 사용했다. 일본은 이곳에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20사단 사령부를 세우며 용산을 발판삼아 대륙침략을 본격화 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은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이 개입했었다.1905년에는 일본이 자국군대의 영구주둔을 목적으로 용산에 300만여평의 토지수용을 요구했다. 이때 수용지역의 토지, 가옥, 묘지 등의 소유자들이 반발하며 실력행사를 하자 일본군 헌병대는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1906년부터는 현재 미8군 자리와 군인아파트 부근에 일본군 병영과 부속건물을 짓는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공사는 1908년에 완공돼 이때부터 용산에는 대대적으로 일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부터 미군 용산에 자리 잡아
미군이 용산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부터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24사단은 1945년 9월 서울에 들어오면서 용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용산미군기지 시대가 시작됐다. 당시 일본군이 군마를 키우기 위해 지었던 벽돌 건물이아직도 용산미군기지 안에 남아있다.미군들로 북적거리던 용산은 1949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다시 미군이 들어오면서 용산은 미군의 군사적 요충지가 됐고 자연스럽게 미군의 사령탑이 들어앉으며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현재 용산 미군기지는 ‘메인 포스트(Main Post.MP)’와 ‘사우스 포스트(South Post.SP)’로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MP에는 주한미군사령부와 8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가 있고 SP에는 주거시설과 학교, 병원, 호텔 등이 있다.지난 반세기 동안 미군이 주둔한 것을 비롯해 700여년간 외국군이 사용해왔던 용산이 드디어 우리 국민들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이전 논의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타협을 보지 못하다 지난 해 열린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에서 용산기지의 경기도 평택 이전이 최종 합의된 것이다.

6공화국 시절부터 이전논의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처음 논의된 것은 노태우 정부시절인 지난 1989년 5월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와 주한 미군은 ‘용산기지 이전 기본 계획’에 합의했다. 그 다음해 6월에는 이전에 관한 기본 합의서(MOU)를 체결했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당장이라도 미군기지가 이전할 것 같았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미군기지근처에 살던 용산구 주민들은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외 정치적 상황과 이전비용, 이전 지역 문제 등의 이유로 용산기지 이전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됐다. 이전에 관한 얘기들이 가끔 튀어나오긴 했어도 큰 진전은 없었다.이런 와중에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이전 논의가 중단됐다. 1993년 6월 북핵 사태가 터지면서 한반도에는 긴장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시절인 지난 2001년 말에 용산기지 이전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한국 국방부와 주한미군이 용산기지 이전을 재추진하기로 합의하고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지난 2003년 용산기지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구체적인 이전계획에 들어갔다. 2008년까지 평택으로 이전하게 될 용산미군기지 자리에는 공원이 지어질 방침이다. 서울시청 도시계획과의 관계자는 “현재 100만여평에 이르는 미군기지에 지어질 공원은 80여만평 정도다”며 “어떤 성격의 공원을 지을지는 현재 논의 중이다”라고 밝혔다. 열린우리당 장영달 의원은 “용산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미군기지의 높은 담벽을 바라보며 가슴 저미곤 한다”며 “용산기지는 그간 잊고 살아왔던 그 무언가를 상기시켜 주는 역사적 상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700여년을 우리민족에게서 떠나 외국군인 전용으로만 사용돼 왔던 용산. 그곳이 이제 공원으로 바뀌어 우리에게 돌아올 그 날을 기대해 본다.


#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길지

용산미군기지 자리는 풍수지리적으로 최상의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다. 풍수전문가들은 이곳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땅이라고 입을 모은다. 배산임수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서는 주택이나 건물을 짓기에 가장 이상적인 땅으로 보고 있다.한국풍수리지연구원 측은 “용산의 미군기지터는 최상의 배산임수 지형”이라며 “이런 좋은 땅에는 외국군의 군대보다는 정부기관이나 공원 등이 들어서야 한다”고 전했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견해에서 용산미군기지 터가 어느 정도로 길지인가에 대해 ‘이곳을 차지하는 사람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견해가 대부분일 정도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풍수를 많이 따지는 일본은 용산 미군기지 터의 명기를 이미 알고 이곳에 일본군을 주둔시키는 한편 조선총독부 관저를 세웠다고 한다. 예전부터 풍수전문가들이 이곳에 정부기관이나 시민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런 풍수지리적인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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