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 같은면 12월의 밤은 불야성이었지. 요즘 밤에 손님 없어요. 경기가 이렇게 안 좋은데 송년회에서 흥청망청 술 마실 기분이 나겠어요.” 지난 11일 밤 종로에서 잠시 쉬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택시기사 김모씨의 말이다. 본격적인 송년회 철이 다가왔지만, 예전처럼 흥청망청 술독에 빠져 보내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기화되고 있는 경기침체여파가 연말 송년모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업계의 무료 이벤트에 참여하거나 조촐한 모임이 점점 늘고 있는 송년회의 달라진 풍경을 담았다. 직장인 김형식(가명·30)씨는 최근 대학 동기모임 회장으로부터 짤막한 핸드폰 메시지를 받았다. “올해는 간단히 하자. 주머니 사정도 어렵고, 취업 못한 애들도 아직 많아서 말이야.” 3년 전부터 매년 12월 셋째 주 금요일에 열어왔던 송년회 모임 공지였다.

작년에 너무 취해 가까스로 친구의 등에 업혀 집에 들어갔던 기억을 떠올리던 김씨는 메시지를 보자 반가웠다. 김씨는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만 올해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송년회 자리를 되도록 피하고 있었기 때문. 빠질 수 없는 대학 동기모임 자리가 내심 걱정이었지만, 간소하게 자리를 갖자는 고마운 연락이 왔던 것. 이처럼 최근의 송년모임이 간소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또 술 없이 진행되는 모임도 늘었고, 송년회자리를 피하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이에 내심 연말특수를 노렸던 룸살롱 등 유흥업소쪽 관계자들은 울상이다. 종로에 있는 C 클럽 김모 상무는 “예전 같으면 연말모임을 끝내고 2차를 나온 사람들로 붐볐는데 요즘은 많이 줄었다”며 “찾아온 손님들도 간단히 마시고 가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강남의 B 호텔 지하에 있는 룸살롱 종업원도 “전단지를 돌리는 등 홍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고객유치가 쉽지 않다”며 “연말이라 각 종 모임을 유치하기 위해 다들 발로 뛰고 있지만 실적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라고 하소연했다. 연말 밤손님이 많은 택시업계도 사정은 마찬가지. 10년째 운전대를 잡고 있는 한모(54)씨는 “예전 같으면 젊은 직장인들이 많은 종로거리에서 택시를 잡으려면 한 시간 정도 기다리는 것은 예삿일이었다”며 “하지만, 요즘은 택시들끼리 경쟁하고 있을 정도이니 할 말 다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모(48)씨도 “손님을 태우기 위해 11시가 넘으면 나이트 클럽, 시내 유흥가를 돌아다녀 보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다”며 “주말에만 잠깐 붐빌 뿐 평소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같은 추세는 경기불황으로 인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술로 회포를 풀고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보다 색다른 모임을 찾는 젊은 직장인들의 풍토도 한몫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특히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활발하다. 포털사이트 프리챌의 한 친목동호회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복파티’를 벌이며 친목을 다질 계획이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주인공 차태현과 전지현처럼 중·고교 시절 입던 교복이나 군복을 입고 참여하면 회비를 면제해 준다. 학창시절의 ‘촌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 춤도 추고 마음에 드는 회원과 즉석 미팅도 즐기며 송년회를 갖자는 것.  다음의 한 스포츠댄스 동호회도 송년회로 ‘광란의 춤판’을 벌인다.

탱고, 왈츠, 차차차 등 자신있는 분야에 짝을 이뤄 춤솜씨를 뽐내는 종목별 댄스발표대회와 송년회 참가자가 모두 함께 즐기는 댄스타임을 갖는 것. 댄스실력이 빼어난 회원에게는 선물도 준다. 미혼 남녀들의 짝짓기 송년회도 인기다. 미혼회원으로만 이루어진 N 클럽은 ‘21세기 첫 크리스마스를 그와 함께’란 이벤트를 기획했다.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은 이성회원 3명에게 E메일을 보내면 운영자가 짝을 맺어주는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이 클럽 관계자는 “어색하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 없이 회원들끼리 짝을 지어보자는 기획으로 회원들의 신청 메일이 쇄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는 지난 14일 ‘부부 기살리기 커플 송년회’를 가졌다. 20∼40대 부부 및 결혼을 앞둔 예비 커플이 참가한 이날 이벤트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발 마사지’를 해 주고, 아내가 남편에게 ‘피부 팩’을 해 주는 등 부부 금실을 다지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업들의 송년회도 술보다는 이벤트를 통해 직원들간 단합을 추구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교보증권 직원 660여명이 사회봉사팀 34개를 만들어 올 연말 양로원이나 고아원 등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송년회를 대신하기로 했다.태평양은 12월 한 달간 직원들의 신청을 받아 점심시간을 이용해 머리를 감겨주고 두피 마사지를 해주는 행사를 열고 있다. 한해 묵은 때와 연말연시 과음으로 인한 숙취를 말끔히 씻어 준다는 취지에서다.볼보자동차는 직원들의 아내와 자녀, 부모님, 애인 등을 초대하는 가족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가족 대항 게임과 장기자랑 등으로 이뤄진 가족축제를 열어 술 없는 송년회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한 개인휴대단말기 업체는 전직원이 경기도 분당 율동공원에서 번지점프를 하며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회를 준비했다. 이같은 기업의 송년회 분위기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술로 대변되던 송년모임은 앞으로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독특하고 의미있는 모임을 선호하는 젊은층에 맞게 변해갈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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