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도 ‘움찔’ 대통령도 ‘좌지우지’

[일요서울Ⅰ박형남 기자] ‘왕실장’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동안 7인회 멤버로 막후에서 ‘조용하게’조언을 해왔던 그는 이번에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까지 올랐다.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다. 특히 김 비서실장의 입지는 더 견고해지고 있다. 강창희 국회의장보다 7살이 많고,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서울대 법대 후배, 홍경식 민정수석(사시 18회), 황교안 법무장관(23회), 채동욱 검찰총장(24회)보다 법조 선배라는 점도 김 비서실장에겐 플러스 요인이다. 여권 일각에서는 ‘박근혜-김기춘 핫라인’을 등에 업고 국정 전반에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 없는 형국이다. 김 비서실장의 파워가 세지면서 여당 중진 의원들조차도 그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 및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던 그에게 의지할 공산이 높아, 당분간 ‘김기춘 시대’가 계속될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8월 13일 경남 통영과 거제를 방문했을 때 김행 청와대 대변인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김 대변인이 선글라스를 끼고 박 대통령을 수행해 이정현 홍보수석에게 질책을 받고, 대변인직에서 물러날 뻔했다는 것이다.

김기춘 청와대 내 위상
“잘 보여야 오래 간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새누리당 당직자는 “선글라스 논란을 일으켜 이 수석이 김 대변인을 호되게 질책했고, 김 대변인을 그만두게 할 것처럼 보였다”면서 “그러나 김 대변인이 ‘7인회’ 멤버인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읍소해 겨우 생존하게 됐다. 이 때문에 김 비서실장이 ‘왕실장이긴 왕실장이구나’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귀띔했다.
특히 김 비서실장이 임명된 이후 관가의 분위기도 싹 달라졌다. 허태열 전 실장은 ‘관치 인사 논란’ 등으로 시간을 허비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 실장 체제로 들어서면서 인사 검증에 속도를 내면서 국정 장악에 힘을 보태고 있다.
더구나 청와대 관계자들도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그가 군기반장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더군다나 지난달 6일 국무회의에서 정홍원 국무총리가 입장하면서 김 실장에게 앞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러한 모습에 정치권에서는 “‘실세’는 ‘실세’”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이런 정치적 위상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양건 감사원장의 사퇴 뒤에 김 실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양 원장은 새 정부 초기 교체설이 나돌았지만 박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유임’되는 분위기였다. 양 원장은 지난 4월 8일 기자간담회 때 “박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유임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교체 가능성이 낮았다.
그런데 김 실장이 취임하면서 양 원장이 곧바로 사퇴했다. 청와대가 올 6월 사임한 김인철 전 감사위원의 후임으로 박 대통령의 대선캠프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한 장훈 중앙대 교수를 임명하려고 했지만 양 원장이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들어 강하게 반대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다. 양 원장은 “재임 동안 안팎의 역류와 외풍을 막고 직무의 독립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물러서는 마당에 돌아보니 역부족을 절감한다"고 토로했다. 유임 전화까지 받았던 양 원장이 갑작스럽게 사퇴한 배경에는 김 실장이 있었다는 것이 정치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당-청 관계도 좌지우지
정무위원들조차 ‘꾸벅’

당·청 관계에 있어서도 김 실장이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분위기다.
당초 박 대통령은 민주당 김한길 대표에게 양자회담 대신 5자회담을 제의했다. 회담을 놓고 이견을 보이자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3자회담을 제의했고, 박 대통령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듯 했지만 다시 5자회담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한 중진의원은 “박 대통령이 황 대표의 제안으로 3자회담을 받아들일 것으로 봤다. 황 대표가 3자 회담 후 양자 회담을 하는 분위기가 무르 익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류는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김 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5자회담을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것 같다”며 “5자회담을 재차 강조한 것은 ‘김기춘 작품’”이라고 귀띔했다. 

‘선글라스 논란’ 김행 대변인, ‘김기춘’에 읍소해 자리보전?

여당 대표 제안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지닌 김 실장. 이러한 이야기가 나돌면서 여당 중진 의원들도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당·청 관계에 있어서 비서실장-정무수석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권 한 중진 의원은 “당·청 관계에 있어서, 비서실장-정무수석이 매우 중요하다. 과거 이정현 수석이 정무수석으로 있을 때는 서로 안면이 있어, 이런 저런 쓴소리를 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전혀 낯선 인물과 어른들이 전면에 나섬에 따라 이렇다 저렇다 할 수도 없다.
그냥 잘하실 거라 기대만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 수석 시절이 그립다는 말까지 나온다.
실제 입법부 수장인 강창희 국회의장은 지난달 6일 국회를 방문한 김 실장에게 “실장님께서는 저한테 대선배이고 관계·정계·법조계에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법대와 법조계 후배인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평소 존경하고 박근혜 정부 탄생 때부터 쭉 큰 힘이 돼주셨던 김 실장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밝혔다. 심지어 황 대표는 김 실장을 ‘어른’으로 부를 정도다. 여기에 청와대에서 견제하고 있는 김무성 의원도 김 실장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청와대 지시에 이제 당이 움직여야 할 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박근혜 핫라인 통해서?

특히 국정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을 내란음모 혐의로 수사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고, 지하혁명조직(Revolution OrganizationㆍRO)이 지난 5월 회합에서 무기 확보, 기간시설 타격 등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국이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이 사건도 ‘김기춘 작품’이라는 말이 많다.
김 실장, 홍경식 민정수석 등 검찰 출신들이 모두 ‘공안통’이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이 수사 내용과 공개·강제수사 착수 시점 등을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이들이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도 어김없이 ‘박근혜-김기춘 핫라인’이 가동됐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국정원은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는 직속기관이어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청와대의 의중이 그대로 반영될 수 있다. 비록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이 사건이 처음 보도된 지난달 28일 “뉴스를 보고 알았다. 사실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밝혔지만 박 대통령의 인지 여부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김 실장은 노태우 정권이 권력을 잡자마자 전두환 인맥으로 둘러싸인 구도를 바꾸기 위해 사정정국, 공안정국을 조성할 때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에 앉힌 사람이다.

양건 사퇴는 맛뵈기…5자회담 고수 등 ‘김기춘 작품’   
여권 중진 의원들, 비서실장 눈치 보는 중 “아쉬움 있지만…”

박 대통령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당선자 시절부터 6개월을 보니 나 홀로 정치 한 분으로 자기 세력이 없다. 그러니 김 실장을 데려다 쓰고, 그러면서 국민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 것 아닌가”라며 ‘내란음모 사건’의 배후로 김 실장을 지목했다.
민주당 핵심 인사도 “과거 경력을 볼 때 ‘이석기 사건’의 정점에는 김 실장이 있는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실제 김 실장은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1989년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 당시 ‘좌익 발본색원’을 총지휘했다.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터졌을 때는 법무부 장관으로 수사 방향을 최종 결정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지역감정을 조장하기로 모의한 초원복국집 사건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그 때문에 대형 공안사건이 정국에 어떤 파장을 낳고, 어떻게 활용 가능한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거친 김 실장이 주도했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에 불만이 많았던 만큼 이번 사건을 통해 국면을 주도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이석기 사태’는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9월 정기국회의 쟁점이 흐려질 가능성이 높다. 9월 국회에 이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제출될 가능성이 높고 민주당도 거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국정원은 이번 이슈를 빨리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내년 지방선거까지 이 의원과 통합진보당 이슈가 간헐적으로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 경우 야권은 앞으로 선거에서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박 대통령이 공안검사 출신을 중용한 것과 이석기 사태는 공안정국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한 것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 첫 법무부 수장이던 김경한 장관은 지난 2002년 검찰을 떠났다가 6년 만에 법무부 장관으로 귀환했다. 그 당시 그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초기부터 “극렬”, “선동” 등의 용어를 써가며 형사 처벌을 독려하는 등 공안몰이에 앞장선 바 있다.
따라서 김 실장의 박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통해 국정 전반에 걸쳐 군기반장 노릇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여, 박근혜 정부에서 김 실장의 파워는 날이 갈수록 더 막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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