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태 한참 전에 靑경호실 요원들의 박정희 시해 음모 첩보 있었다

 나는 육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 보좌관직을 마치고 1977년 초 사령부 내 인사처장으로 가서 당시 육해공 각 군별로 나뉘어 있던 보안사 조직을 통합해 그해 10월 7일 국군보안사령부(ASC)를 탄생시켰다. 보안사 창설기념일은 10월 7일이었으나 후에 특무대 창설일인 10월 21일로 바뀌었다. 경찰 창설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보안사 조직을 개편하는 작업 과정은 인력, 직급, 장비, 임무기능을 통합함에 있어서 각 군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보니 이를 조정하는데 힘이 들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노재현 장군이었고, 보안사령관은 진종채 장군이었다. 진 사령관은 동기생들 보다 나이가 많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옳은 일이라고 여기면 절대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이었다. 

▲ 차지철(왼쪽에서 두 번째)은 1974년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저격사건으로 자진사퇴한 박종규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됐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을 밀착 보좌하면서 총애를 받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연합뉴스>
보안사령관 진종채 vs 
경호실장 차지철의 갈등
 
진 장군은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1974년 부임한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은 산하 30경비단 연병장(당시 경복궁에 위치)에서 매주 수요일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육·해·공 참모총장,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등 서울과 수도권 군부대 지휘관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하기식에 맞춰 열병·분열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차 실장이 임석 상관이었다. 이 열병·분열식이 열릴 때마다 차 실장은 군 지휘관들을 모두 호출했는데 유독 진 사령관만 참석하지 않고 거부하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어느 누구라도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권력 실세 중의 실세인 차 실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소신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왜 그 자리에 참석 안 하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진 사령관은 “군 통수권은 대통령-국방부 장관을 통해서 내려오는 것인데 통수권을 경호실장이 장악해 좌지우지하는 것은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안 간다”며 원칙적인 입장을 지켰다. 
 
차 실장은 진 사령관의 자세를 못마땅하게 보고 항상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하지만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차 실장도 심복 부하지만 진 사령관도 아끼는 부하였다. 이 때문에 차 실장이 진 사령관을 자기 맘대로 괴롭힐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청와대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 하나가 벌어졌다. 차 실장을 보좌하던 정인영 경호처장(해병대-함경도 출신) 밑에서 일하던 안재송 부처장과 경호요원 몇몇이 박 대통령을 시해하려 한다는 첩보를 보안사가 제보로 입수하면서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안사 김학호 대공처장이 수사책임자를 맡아 비밀리에 호텔에서 제보자를 만나 조사했고, 그 내용을 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진 사령관은 지체치 않고 조사 결과를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곧바로 차 실장을 불러 심하게 추궁했다. 이 소동으로 경호실은 그야말로 초상집 같이 울음바다가 됐다. 이후 조사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결론나면서 차 실장과 진 사령관의 관계는 더욱 껄끄러워졌고 경호실과 보안사 간에 갈등의 골도 깊어졌다.  
 
또 하나의 일화는 박근혜 대통령(당시 큰 영애)과 관련된 이야기다. 대구의 모 군부대 병사가 연정을 품고 큰 영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계속 보낸 일이 있었다. 그 편지를 보안사와 경호실에서 검열했다. 물론 그 병사는 ‘미친놈’으로 취급됐고, 문제의 편지들은 중간에서 잘라 불송 처리했다. 그런데 이 병사는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오질 않자 한 술 더 떠 원앙침 안에다 편지를 넣어 소포로 발송하기도 했다. 또 병사의 형이 대구에서 금은방을 했는데 금반지와 목걸이, 팔찌까지 고가의 금제품을 만들어서 보내왔다.
 
하지만 편지든 소포든 부쳐지는 족족 경호실이 중간에서 차단하다보니 큰 영애의 손에 전달될 리 만무했다. 진 사령관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결국 문제의 병사가 보낸 소포가 없어졌다며 경호실을 대상으로 조사가 벌어졌지만 그 소포는 광화문우체국 사서함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보안사와 경호실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경호실 창설기념일에 관련 기관인 보안사나 정보부 소속 요원들에게 표창을 주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마침 내가 추천 받아 표창을 받기 위해 청와대 기념행사장에 줄을 서 있었다. 내 차례가 됐을 때 차 실장은 “보안사구나”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난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띠면서 표창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진 장군은 군인의 명예를 걸고 원칙을 지켰던 보안사령관(중장) 보직을 떠나 2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이어 몇 년 뒤 5공화국 때 대장으로 승진했다가 예편했다. 진 사령관은 비단잉어와 원예를 좋아해서 집에다 비단잉어를 기르고 정원을 잘 가꾸느라 분재전문가들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바람에 우리 참모들도 그때 분재에 대한 상식을 많이 익혔던 일이 생각난다. 난 진 장군이 보안사령관 재임시 인사처장으로 3군 보안사를 통합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진 사령관은 평소 고집이 셌지만 맡은 일에는 합리적으로 처리했던 지휘관이었다. 그가 2군 사령관 시절 5.18 광주민주화항쟁 사태를 뒷정리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서슬 퍼렇던 부산 
‘삼일공사’ 책임자로 발령
 
나는 보안사 근무를 마치고 부마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1978년 부산지구 보안부대장을 맡아 내려갔다.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 현지 보안부대는 ‘삼일공사’라는 별칭으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일공사는 부산 시민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겁먹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내가 부임하던 시점에 전임 보안부대장은 부대를 교외인 망미동으로의 이전 사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장은 김재규였다. 그는 보안사령부의 기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보 업무규정을 개정하는 작업을 벌였다. 보안사가 민간에 대한 정보 보안활동을 일절 못하도록 하고 군과 관련된 정보수집만 하도록 제한했다. 보안사의 정보수집 기능을 제한하는 업무규정을 조정하는 작업은 당시 젊은 검사 출신으로 중정 5국장이었던 김기춘 현(現) 청와대 비서실장이 수행했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부산에 내려가 보니 보안부대 기능이 축소돼 과거의 ‘삼일공사’가 권력을 휘두른 때에 비해 크게 할 일이 없었다. 하루는 부산에 있었던 해역사령관(제독) 일행과 골프를 치러나갔다가 간첩선이 나타났다는 무전 연락을 받았다. 무전 내용은 우리 해군 PK고속정이 간첩선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히 부대로 돌아와 보니 상황은 이미 종료돼 있었다. 얼마 후 간첩작전 전공자 시상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 나가봤더니 해군 해역사령관이 가장 큰 전공으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고 속으론 비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겉으로는 해역사령관에게 “골프를 잘 쳤다고 상 받았느냐”고 농담을 건넨 적이 있다. 
 
그 시기에 부산에는 이학수 공군비행단장의 후임으로 영화배우 신성일 씨 친형인 강신구 장군이 부임해 있었다. 해양경찰대장으로는 염보현 씨(훗날 치안본부장, 서울시장)와 공병단장인 안무혁 씨(훗날 국세청장, 안기부장)도 내려와 있었다. 
 
난 부산 지역의 보안부대장으로서 지역 군 부대장들과 경찰, 정보기관장들과 원활한 업무협조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사적으로는 어울려 돌아가며 술도 한 잔씩 하고 서로 가깝게 지냈다. 염보현 해양경찰대장은 사석에서 부산지역이 세 가지 점에서 좋다고 했다. 첫째는 서울보다 공기가 좋고, 두 번째는 생선이 싱싱해 맛있고, 셋째는 높은 사람이 없어서 좋다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 
 
▲ 박정희 유신 정권은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날 오전 부산시청의 모습. <연합뉴스>
들끓는 부산민심 
부마사태 발발
 
1979년 후반기 난 부산 보안부대장으로서 오랫동안 정보활동을 해온 임재두 군무원을 중심으로 임무를 부여했다. 그 임무는 부산지역 대학생들의 움직임과 여론을 파악해 오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파악된 결과를 일주일에 2번 정도 나에게 보고했다. 수집된 정보들은 대체로 부산 민심이 4.19 직전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외국에서 실종되고 서울에서는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하다가 강제해산 되는 불상사가 있었다. 야당인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직무가 법원에서 가처분 정지된데 이어 국회에서 의원직까지 제명돼 정국은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였다. 
 
임 군무관 등 보안부대 요원들의 보고에는 부산 산복도로 위에 살고 있는 서민촌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운데다 정치적 상황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었다고 했다.  
 
들끓는 부산지역 민심은 결국 그해 10월 15일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다음날인 16일 부산대에서 동아대로 시위가 터져 나왔다. 여기에 시민들까지 합세해 40여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태로 확대됐다. 부마사태의 시발점이었다. 
 
이에 지역 주요 기관장들은 최석원 부산시장실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나와 함께 이수영 부산 시경국장, 현지를 관할하는 울산 출신 정성만 2관구사령관도 함께 있었다. 그날 박찬긍 군수사령관은 대만에서 원로장성들이 부산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같이 술을 마셔 많이 취해 있던 상태였다.
 
이날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박 대통령의 사전 지시를 들었다. 몇 시간 뒤 저녁 차지철 경호실장은 부산지역 주요 기관장들이 다 함께 모여 있던 시장실로 전화를 걸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참석자들은 당황한 낯빛으로 “경비계엄이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차 실장은 다그치듯 다시 한번 비상계엄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10월 17일 오전 내무장관 구자춘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초동 시위진압 실패 책임을 물어 이수영 시경국장을 해임하고 후임에 육사 8기 송제근을 임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찬긍 군수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을 맡았다.
 
그런데 비상계엄 선포 하루만인 19일 차지철 실장이 정성만 2관구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계엄사령관을 교체해야겠다고 말했다. 차 실장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경고하듯 엄포를 놓았다. 
 
“지금 군을 동원해서 사태를 진압해야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차 실장의 벼락같은 말에 잔뜩 겁을 먹은 정 사령관이 “큰일 났다”며 급히 나를 찾았다. 그는 “우선 공병단(단장 안무혁)을 부산진역으로 출동시켜 놓았다”고 했다. 그런데 공병단이 들고 나간 장비라고 해봐야 삽이나 곡괭이였다. 난 보안부대 요원들에게 매일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시위 현장 상황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 사령관은 시위가 얼마나 격렬해지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나타나면 시위 군중들이 모두 물러갈 것이다.” 
“사령관님 군중들이 흥분해 있습니다. 군부대가 나타나면 분위기가 오히려 험악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 부산진역으로 나가보자.”
 
공병대원들은 이미 역 앞에 대기하고 있었기에 정 사령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헌병 차를 앞세우고 그 뒤를 덮개가 없는 무개 작전 차량에 정 사령관이 타고, 마지막에 내가 탄 짚차가 따라 갔다. 부산 중앙동에 도착해보니 건널목 다리 계단에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군용차를 본 시위 군중의 일부가 화염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긴 목봉을 들고 휘두르는 바람에 앞에서 달리던 헌병 짚차가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무개 짚차를 탔던 정 사령관이 탄 짚차가 공격의 표적이 됐다. 그는 운전병만 남겨두고 내가 탄 차로 갈아탔다. 앞뒤가 가로막힌 상태에서 우리가 탄 짚차는 좌우 충돌 속에 방향을 돌려 아수라장 같았던 시위 현장을 뚫고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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