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는 즉각 잘못된 교과서의 검정을 취소하라”

과거사 피해자 단체인 ‘친일·독재 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 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12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규탄 및 검정 무효화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에 통과한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심각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교육·역사·사회분야 465개 단체로 구성된 ‘친일·독재 미화 뉴라이트 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는 지난 12일 출범식을 가지고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 퇴출을 위한 범국민운동에 돌입한다고 선포했다. 민주당 역시 교학사 교과서를 집중분석하고 교과서 합격 취소를 요구하고 있다. 교육부는 교과서를 전면 수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일요서울]이 문제의 교학사 교과서의 왜곡 논란 부분을 되짚어봤다.

위안부, 제주4·3사건, 광주5·18민주화운동 등 298건의 오류 발견
식민지 근대화론·특정 정치세력 미화 논란에도 불구하고 “수정 의사 없다”

지난 8월 30일 국사편찬위원회는 내년 3월부터 사용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최종 검정심의결과를 발표했다. 최종 합격한 8종의 교과서 가운데 교학사 교과서에서 역사 왜곡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 미화·일본 시점에서 서술

민주당은 교학사 교과서를 집중분석한 결과 친일에 관한 내용을 소극적으로 기술하고 미화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수용·서술했다고 밝혔다. 교과서 278쪽에서는 ‘한국인 상공업자는 경제적 자립이 곧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 민족 경제 발전에 노력했다’고 서술하며 그 예로 화신 백화점을 들었으나 화신백화점 회장 박흥식은 1949년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자 제1호로 체포된 바 있는 친일파다. 또한 247쪽에서 ‘일제는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을 발표하고 일부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당했다’고 서술했으나 역사학계는 1930년대부터 위안부가 강제 동원된 역사를 축소 기술했다고 반발했다.

‘일제 강점기의 사회·경제적 변화(282쪽)’에서는 ‘일제가 강요한 이러한 규율들은 한국인의 근대 의식을 일깨우기도 했지만 일제의 지배에 반발하는 의식을 배양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은 시간 사용의 합리화와 생활 습관의 개선을 일제로부터 강요받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지속될수록 근대적 시관관념은 한국인에게 점차 수용돼 갔다’고 서술하고 있어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190쪽 을미사변과 관련 사료탐구에서는 고바야카와 히데오 회고록 ‘민비조락사건’을 인용했으나 실제 회고록 제목은 ‘민후조락사건’이다. 또한 정미의병과 항일의거 활동을 서술한 207쪽에서는 ‘의병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토벌은 적 따위를 무력으로 쳐 없앤다는 뜻이며 다른 교과서에서는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금성출판사)’, ‘의병 토벌에서 의병 4000여 명이 체포되거나 학살당했다(미래엔)’, ‘일본은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며 대대적으로 의병을 공격했다(두산동아)’라고 기술했다.  

그 외에도 강화도조약에 대해서는 ‘개화파의 주장과 고종의 긍정적인 인식으로 체결됐다’고 기술했으며,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 북로군정서를 북로군정서군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선사편찬위원회로 잘못 작성한 오류도 발견됐다.

특정 정치인 미화

이준식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은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교과서에서 임시정부는 50여 차례 거론되는데 그 가운데 반 정도는 이승만과 임시정부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 이승만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서술한 것”이라며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런 이승만을 영웅으로 미화하기 위해 교과서는 여러 무리수를 뒀다. 단순한 오류 말고도 의도적 왜곡이 눈에 띈다”고 주장했다.

교과서 269쪽에서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 교수이기도 했다’고 기술했다. 윌슨은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이승만은 1908년 9월부터 1910년 7월까지 프린스턴에 재학했다. 이 위원은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 재학 중일 때 윌슨은 총장으로 학생을 지도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293쪽에서는 ‘OSS(미국 정보기관 전략사무국)부대와 한국광복군의 협력은 그(이승만의 노력) 성과’라고 서술했으나 OSS는 1943년 이승만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었다. 같은 페이지 사료탐구에는 1942년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에 대해 소개하며 ‘이승만은 당시에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방송을 함으로써 국민들과 더욱 친밀하게 됐고 광복 후 영웅이 될 수 있었다’고 서술했다.

이 위원은 “당시 국내에서 단파방송 수신기로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경우는 극소수였다. 실제로 이승만을 존경하고 영웅시하게 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은 거의 없다”고 비판했으며 민주당 역시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 ‘광복 후 영웅’ 등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을 사용해 이승만을 미화했다고 지적했다.

“국민들 역사 정서적으로 배워”

교학사 교과서는 3·15부정선거, 4·19혁명, 제2공화국에 대한 설명을 반 페이지에 모두 담아 관련 설명이 소홀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또한 제주 4·3사건을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 기관을 습격했다. 이때 많은 경찰들과 우익인사들이 살해당했다.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됐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는 4·3사건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규정과 어긋나는 서술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시위대가 무장하고 도청을 점거한 상태에서 계엄군이 광주를 장악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또한 324쪽 ‘장면 정부는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군비축소를 약속하고 사회적으로 치안이 어려운 상황에서 경찰력의 대부분을 타지로 전출시키는 등 경찰의 치안능력을 약화시켜 혼란을 자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단행했다’, 326쪽 ‘긴급 조치는 유신 헌법에 따라 비상대권을 행사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기본적으로 체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발동한 조치였으며 9호까지 발동됐다’고 기술해 5·16 및 긴급조치와 유신독재를 정당화하려 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 왜곡 논란과 함께 검정 취소 여론이 확산되자 교과서를 집필한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지난 13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통화에서 “우리 검정기준에서 보면 (교과서에) 친일은 없고 대한민국 정체성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은 서술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교수는 “강화도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자주적인 의지와 관계없이 조약이 체결됐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맥이며, 당시 조약은 (조선의) 자주적인 판단에 의해 맺어진 것”이라며 “역사를 상당히 정서적으로 배운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일제에 강요받았지만 우리 민족의 역량에 따라 삶을 향상시키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서술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잘못된 연도, 사진 등의 오류는 수정하지만 제기되는 역사 왜곡 논란에 대해서는 수정 의사가 없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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