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 특수부대 개입 사실 아닙니다"

[일요서울|조아라 기자] 27년간 외신기자로서 한국 현대사의 역사를 사진으로 담아낸 정태원 전 로이터통신 한국지국 사진부장이 최근 의미 있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서울발 사진종합’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1970년대 후반 부마항쟁부터 광주항쟁, 6월 항쟁기를 현장에서 담아낸 사진 180여 점을 수록하고 있다. 언론탄압으로 보도가 자유롭지 못한 시절 그는 외신기자로서 한국 민주화 현상을 사실 그대로 보도해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목격자이자 기록자로서 한국 현대사의 중심을 관통해온 정태원 기자를 만나봤다.

 “사진은 진실입니다.”
 
민주화 격동의 시기를 현장에서 담아낸 정태원 기자. 그는 세계 유력 통신사인 UPI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전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 또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은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포착해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세계 유력 잡지에 사진을 실은 베테랑 기자다. 퓰리처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그의 사진에는 사실성과 진정성이 묻어 있다. 
 
정 전 부장이 처음 사진을 시작한 건 6·25전쟁 정전 이후 미 전방 17연대(현 미 7사단)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미군 훈련부에서 취미활동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그는 서울로 근무 장소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사진 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사진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이도 만났다. 그렇게 정 전 부장은 1967년 미군 기관지인 성조(Stars and Stripes)지의 한국지국 외신기자로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 제가 첫 취재에 나간 날이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취재를 갔는데 알고 보니 미 험프리 부통령이 부대를 방문한 현장을 촬영하는 거였죠. 부통령을 취재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미 특수부대원들이 눈앞에서 살아있는 뱀을 잡아먹는 시범까지 보였죠. 사진기자 생활 첫날부터 큰 임무를 맡은 거죠. 그래도 그때 찍은 사진이 바로 다음날 성조지에 대서특필됐어요.”
 
정 전 부장의 강단과 배짱은 특종의 현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부마사건 취재 후 직감적으로 시위가 광주로 번졌다는 걸 느낀 그는 곧바로 광주행 버스에 올라탔다. 1980년 5월 17일 광주에 도착한 뒤 외신기자로는 최초로 취재 증명 발급을 받았다. UPI 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보도된 그의 사진들은 다음날인 18일 일본의 한 신문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관제보도로  언론에 냉소적이었던 시민들도 이후 외신의 취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광주 1990.5.17. 광주. 뒤에 동료 경찰이 화염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한 전투경찰이 대응 준비를 하고 있다. 1000여 명에 이르는 전남대 시위 학생들은 1980년 특수부대원에게 무참하게 짓밟혔던 광주항쟁 10주년 기념일 하루 전인 5월 17일 경찰과 격전을 벌였다.<눈빛출판사>
“광주민주화운동은 너무도 큰 비극의 역사입니다. 게다가 M16자동소총이라는 신무기를 처음 들여와 사용한 곳이 바로 광주였어요. 제가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기자회견에서 왜 한국군에게 M16자동소총을 줬냐고 물어봤어요. 그때 답이 ‘한국군을 현대화하기 위해서’였어요. 미국은 외국 정부가 정권 다툼을 할 때 이기는 쪽 편을 들어주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거든요. 절대 약자를 도와주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 더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죠.”
 
정 전 부장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취재해 열흘 간 특종을 했다. UPI의 경쟁회사인 AP통신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저격수의 총에 맞을 뻔한 상황에서도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당시 국내 기자들이 직접 취재현장에 나서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한국 특수부대가 투입된 건 사실이에요. 시위 진압하는 것만 봐도 일반 군인들하고는 달랐어요. 계엄군 군복 속에 특수부대 군복을 입고 있는 것도 봤고요. 최근 종편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1개 대대가 내려와서 활동했다고 보도를 했는데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니에요.”
 
정 전 부장은 1980년 5월 27일 217명의 시신을 확인하고 광주를 나섰다. 그때를 기록한 사진 대부분은 UPI에서 함께 근무했던 일본인 기자가 일본으로 가져갔다. 중앙정보부에서 사진을 가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퓰리처상 후보로까지 거론될 만큼 좋은 사진들이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일부만이 보관되어 있다. 
 
▲ 판문점 1986.5.3. 서울. 한미연합사령부 소속 공동경비구역의 한 하사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판문점의 긴장된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눈빛출판사>
사진과 보도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꾸준히 특종을 만들었다. 판문점을 출입할 때는 북한 공비의 기습에 미군 2명이 즉사한 사건을 보도해 유엔군 사령관이 바뀐 일도 있었다. 미 국무부보다도 발 빠른 보도였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가는 북한 군인들을 포착해 유엔군 사령부를 떠들썩하게 한 일도 있었다. 당시 판문점 근처에서 북한 특수부대인 114부대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 전 부장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대체로 근접촬영을 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민주화 학생시위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주로 학생과 경찰이 대치하는 분위기를 찍었다. 반면 그는 근접촬영으로 대상의 표정과 감정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것도, 그 사진이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렸던 것도 사진에서 현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이한열 1987.6.9. 서울, 한 학생이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 군을 부축해 옮기고 있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 사이에 서 있는 이 두 학생은 연세대에서 열린 고문 종식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가 후 경찰과 충돌하였던 500여 명의 학생 시위대 소속이었다.<눈빛출판사>
“우리나라는 민주화 격동기를 지나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것 같아요. 학생운동을 하다 죽은 열사만 54명이에요. 이한열 열사는 죽음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참 운이 좋았죠. 백골단한테 맞아 죽은 학생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현장에 사진기자들이 한 명도 없어서 당시를 기록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는 사진 속에 진실성을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찰의 가혹한 구타에도, 중앙정보부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카메라로 진실을 보도한 정태원 사진기자. 스스로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대장정의 현장에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 말한 그가 있어 우리 현대사의 진실이 사실대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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