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해승 후손의 땅찾기 싸움
‘친일파’ 이해승 후손의 땅찾기 싸움
  • 오두환 기자
  • 입력 2014-03-17 10:17
  • 승인 2014.03.17 10:17
  • 호수 1037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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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행적 둘러싼 논쟁 “할아버지는 친일파 아니다”
▲ 이해승

호텔 직원도 모르게 진행되는 소송건
패소한 사건 모두 불복해 상소 진행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친일파의 후손은 여전히 잘사는데 독립유공자 가족은 아직도 고통 받고 있다” “왜놈들 군에 끌려가서 반세상 보내고 그렇게 나이 먹어서 기술도 못 배웠으니 잘 살래야 잘살 수 없다” 지난 1일 삼일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흘러나온 유관순 열사 조카 유장부씨와 독립유공자 이종열씨의 한 섞인 말이다. 1945년 광복 이후 7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의 삶은 오히려 더 막막해졌다. 반대로 일제에 빌붙었던 친일파들은 사회·경제의 주역으로 승승장구하며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되기 전부터 친일파 청산에 대한 문제는 큰 논란이 됐었다. 결국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미군정, 이승만 대통령의 의견 대립으로 친일파 청산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친일파로 지적받던 인사들 대부분 정부 요직에 앉으며 사회·경제적 주도권을 잡게 됐다. 그들의 권력과 재산이 후대로까지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대립의 가장 큰 원인은 친일파를 정부 수립 이전에 청산하느냐 나중에 청산하느냐의 문제였다. 박헌영과 이승만 대통령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친일파의 정의’와 ‘범위’를 두고도 서로 의견이 달랐다. 또 당시 미 군정청 하지 사령관은 친일 출신 인사들을 배제하면 나라가 침몰한다고 맞서 친일파를 청산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부터 사회·경제적 주도권을 잡게 된 친일파들은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1994년부터 진행해 온 사전편찬 작업을 마무리 해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자 또다시 친일파 청산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했다.

▲ <뉴시스>

친일인명사전 발간으로 친일파 청산문제 재등장

친일인명사전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ㆍ찬양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한국인의 목록을 정리ㆍ분류한 사전이다. 총 3권, 3,000여 쪽에 달하는 친일인명사전은 을사조약을 전후해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일제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주요 친일행각과 광복 이후의 행적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사전이 발간되면서 또다시 친일파에 대한 정의와 범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장면 전 국무총리,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안익태ㆍ홍난파, 언론인 장지연, 소설가 김동인 등 유명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던 인물 20명가량도 포함돼 논란이 됐다. 이들 인사는 지난 2008년 4월 발표했던 친일인사 4,476명 중 387명은 이후 친일행적 조사결과 친일명단에서 제외되거나 추가조사가 필요한 인물, 수록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인물 등 명단 수록이 보류된 것이었다.

친일파 후손들 땅 찾기 소송 줄이어

많은 논란 속에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고 친일파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는 가운데 친일파 후손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친일파로 불리는 조상들의 재산과 관련된 소송 때문이었다.

국고로 환수된 조상들의 땅 또는 환수될 땅에 대한 소유권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들이었다.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지키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친일파와 그 후손들을 향한 국민들의 시선도 따가워 졌다. 선조들의 친일 행적으로 얻은 부귀영화를 사회에 환원하지는 못할망정 그 재산들을 자신들이 가지려 한다는 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친일파 후손들의 이러한 행동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됐고 범시민운동이 일어 친일파들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욱더 높아갔다.

친일파 후손들의 땅찾기 소송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사례는 민영은 후손들의 소송전이다. 민영은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지역의 유명한 갑부였다. 많은 토지를 보유한 지주였고, 운수업 등을 경영한 기업가였다. 괴산군과 청주군 등에서 군수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조선국방의회연합회의 충청북도 조직인 충청북도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 조선신궁봉찬회 고문, 조선군사후원연맹 충북지부 부회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을 두루 맡았고, 시중회에도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중추원 참의로 있던 1935년에는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본 천황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되어 천은에 감읍하였다고도 적혀 있다.

2011년 민영은 후손들은 청주시가 도로로 쓰고 있는 상당구 소재 토지 12필지에 대해 도로를 철거하고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냈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대적인 여론 등에 힘입어 지난해 11월 법원은 “대상 토지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국가귀속 요건을 충족하는지에 대해 자료 조사와 법리 검토를 한 결과, 민영은이 친일행위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라고 판단했다”며 청주시 승소로 판결했다. 이후 법무부는 해당 토지를 국가 소유 명의로 이전하기 위해 별도 소송을 제기했다.

친일 후손으로 조상의 땅 찾기 소송과 관련해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있는 사람은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다. 이 회장은 조선 왕족 이해승의 손자다. 이해승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가문을 잇는 왕실 종친이다.

한일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20살 되던 해에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최고 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았다. 또 1911년 1월 일제로부터 은사공채 16만8000원을 받았다. 은사공채 16만8000원은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20억 원 이상이다. 은사공채는 일제가 한일합병에 협력한 관료들에게 내린 포상금 성격의 공채다.

이우영 회장 상속재산
할아버지 친일행각 논란

이해승은 친일 단체에도 몸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1915년 1월에는 일제의 지원을 받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고문이 됐고, 1917년 2월에는 이완용 등의 주도로 설립된 친일단체 불교옹호회에서 활동했다. 1942년 1월에는 조선귀족회 회장 자격으로 미나미 총독에게 국방헌금을 전달했다.

광복 후 이해승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이승만정부가 특위를 해체하며 풀려났다. 이어 6·25전쟁이 터진 뒤 이해승은 북한군에 납북돼 행방불명됐다. 이해승의 장남이자 이 회장의 아버지 이완주는 이해승이 납북되기 전 1941년 사망했다. 결국 손자인 이 회장이 할아버지 이해승에 대한 실종선고를 신청했고 1958년 실종선고를 받았다. 다음해인 1959년 이 회장은 할아버지의 재산을 단독 상속했다.
이 회장이 할아버지로부터 상속 받은 재산 중 일제로부터 할아버지가 받은 땅은 총 205필지 377만여㎡ 규모다. 땅은 포천시, 평택시, 충북 등에 흩어져 있다.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재산을 국가에 반납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소송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대법원에서는 이해승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면서도 친일 재산 환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에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로 규정했다. ‘한일합병의 공’을 증명하지 못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볼 수 없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이 특별법 덕분에 정부를 상대로 낸 첫 소송에서 2010년 최종 승소해 320억 원 상당의 땅을 지켜냈다. 하지만 이 판결 덕분에 2011년 특별법이 개정되고 말았다.

특별법 개정으로 친일파 재산 환수 속도

국회는 2011년 5월 새누리당 김을동 의원의 대표발의로 특별법을 개정했다. ‘한일합병의 공으로’라는 문구가 삭제됐다. 그 결과 한일합병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계승한 자’라면 모두 친일 재산 국가귀속 대상이 됐다.

국회는 “‘한일합병의 공’이라는 범위가 분명하지 않고 추상적인 문구이며, 친일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일제가 작위를 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특별법 개정 이후 이 회장은 나머지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결국 이 회장은 패소한 소송에 불복해 상급법원에 상소한 상태다. 또 개정된 특별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정부는 이 회장과의 소송에서 계속 승소하고 있다. 이해승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지정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재판도 이겼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아 번 돈 228억을 반환하라는 소송도 승소했다.

하지만 이 회장 측은 소송에 불복 패소한 모든 사건을 다시 상급법원에 상소했다. 아직까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전이다.

이 회장 소송과 관련해 그랜드힐튼호텔 홍보팀에 문의를 해 봤다. 이 회장은 업무상 일정으로 해외에 나가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내부 직원들도 이 회장이 할아버지 땅 문제로 소송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분위기다. 홍보팀 관계자들도 신문보도를 보고나서야 알았다고 할 정도다. 호텔 측에서도 소송과 관련해 별도 보도자료나 홍보 업무를 맡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freeore@ilyoseoul.co.kr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