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폭행·성추행·죽음… ‘한국판 아우슈비츠’

이유도 모른 채 구타·납치…평범한 회사원이 원생으로
폭행으로 사망해도 사인은 ‘쇠약?’ 밝혀지지 않은 진실

[일요서울 | 이지혜 기자] 27년 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한국판 아우슈비츠(나치 강제수용소)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지난 22일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형제복지원의 진실’이 방송된 이후 잔인했던 사실과 납득할 수 없는 처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3000여 명 넘는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감금된 상태로 강제 노역을 해야 했고,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던 그곳, 부산 형제복지원. 과연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87년 3월 22일 부산광역시 북구(현 사상구) 주례동에 위치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 ‘형제복지원’에서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탈출한 원생들의 입을 통해 형제복지원에서 있었던 최악의 인권유린이 세상에 알려졌다.

군대식 조직생활 불법 감금·강제 노역

“(간부들에게) 폭행 당하다 보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마디다.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맞다보면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는 말이 나온다.”

형제복지원에 감금됐다가 가까스로 풀려나온 피해자의 진술이다. 부랑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사회복지시설’로 알려졌던 형제복지원은 불법 납치와 감금, 폭행과 강제노역이 실시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일어난 것으로 당시 형제복지원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진술을 가족도 믿지 않았다.

1982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김영욱씨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형제복지원에 관한 책을 펴냈다. 지난 2011년 김씨는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겪었던 형제복지원의 실상에 대해 입을 열었다. 김씨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것은 1982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김씨는 퇴근길에 부산역 앞에서 뉴스를 보던 중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뒤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김씨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사람을 마구 굴렸다”고 회상했다. 그곳에서 김씨는 자물쇠로 채워진 방에 갇혔다. 방에 있는 철제침대에는 얇은 천이 하나 깔려 있었으며 겨울에는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화장실도 3명 이상 갔으며 세수를 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오전 5시 기상 후 예배당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는 와중에도 폭행이 가해졌다. 김씨는 “음정과 박자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에서 폭행은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심하게 폭행 당한 사람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김씨는 “원생 중 한명이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반항을 한 뒤 각목으로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질질 끌려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생활은 군부대식 조직 생활로 이뤄졌다. 소대장, 분대장, 조장, 서무 식으로 계급이 정해져 있던 것이다. 10세 때 형제복지원에 감금된 김모씨는 “1명이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옷차림 등을 이유로 중대장한테 찍히면 소대장 귀에 들어가 소대원 모두가 기합을 받는다”고 진술했다.

또 이들은 음식을 가지고 여성 원생들에게 성추행도 일삼았다. 원생들이 항상 굶주려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복지원에 수감됐던 한모씨는 “밀빵 같은 음식들을 미리 챙긴 뒤 여자들에게 주고 성기나 가슴 등을 만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3000여 명이 넘는 형제복지원 원생 중 억지로 끌려온 2500여 명의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항상 폭행에 시달렸으며 이는 어린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구타나 질병 등으로 고통을 받아도 병원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원생이 사망해도 형제복지원 측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당시 울산지청 수사 결과 형제복지원에서 작업 중 간부들로부터 폭행당해 죽은 원생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죽은 원생의 사망진단서에는 사인이 ‘쇠약,각혈’이라고 명시됐다. 온몸에 피멍이 든 상태로 죽은 원생의 사인 또한 ‘쇠약, 간장’이었다.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 변호사)에 따르면 이들의 검안했던 의사가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진술을 거부했다.

이렇게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 원생들은 폭행으로 죽은 시신을 교회 앞마당이나 복지원 주변에 암매장 했다고 진술했으나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다.

“감금·폭행은 무죄 횡령 혐의 2년 6개월”

불법 납치와 감금 폭행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질렀던 형제복지원이지만 그 원장은 자신의 죗값을 받지 않았다. 법원이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 대해 횡령 혐의만 인정해 2년6개월형을 선고했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국가로부터 20억 원이 넘는 지원금을 받았다. 이 지원금은 모두 박 원장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3000여 명의 원생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수익금 역시 박 원장에게 돌아갔다. 검찰이 부산 형제복지원에 있는 박 원장의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을 때 은행에서나 있을 법한 초대형 금고를 발견했을 정도였다. 그 안에는 현금으로 수십억 원이 있었고 달러와 엔화 같은 외국 화폐들이 다량 발견됐다.

이같은 횡령 혐의를 제외하고는 감금, 납치, 폭행 등에 대한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김용원 변호사는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외압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부산시장은 물론이고 검찰에서도 수사 중지를 시킨 것이다.

박 원장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복지사업계의 거물이었다. 박 원장이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결국 외압으로 인해 박 원장은 법의 심판을 피했고, 형제복지원 사건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씨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형제복지원에 대한 책을 발간하고 1인 시위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 주에 방송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룬 이후 전 국민의 관심도 받고 있다.

피해자들이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만큼 사건 해결을 위한 조속한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jhooks@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