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32

두 번 사형위기 두 번 백의종군
현장에서 백성의 눈물을 닦아라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선조(宣祖)의 명으로 한산도에서 포박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5일 서울에 도착한 이순신은 의금부 옥(獄)에 갇혔다. 당시 선조가 거론한 이순신의 죄는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주고 치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저버린 죄, 심지어 남의 공로를 가로채고. 또 남을 죄에 몰아넣은 죄, 그 모두는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한 죄(欺罔朝廷, 無君之罪, 縱賊不討, 負國之罪, 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姿, 無忌憚之罪)”이다.

그 각각의 내용은 이순신이 선조가 명령한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한 것, 이순신의 몇몇 부하들이 공로를 과장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불을 질렀다는 것을 이순신이 부하들을 신뢰해 결과적으로 허위 보고를 한 것, 원균의 공로를 가로챘다는 비판, 원균을 비방했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 중 부산 일본군 진영 방화 사건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한 것은 당시 지리적·전술적 요인에 의해 훗날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원균의 공로를 가로챘다는 비판은 사실에 어긋나는 과도한 죄목이다. 원균을 비방했다는 것은 《선조실록》의 기록은 물론, 이순신 자신의 《난중일기》, 기타 다른 사료로도 증명할 수 없는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책임은 개인적인 고통보다 더 중요

어쨌든 이순신은 그와 같은 죄목으로 선조에 의해, “이렇게 수많은 죄상이 있는 만큼 법으로 보아서 용서할 수 없으니 법조문에 따라 처단해야 마땅할 것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최악의 순간을 맞게 되었다. 즉 이순신은 사형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 시기에 최고의 장수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판중추부사 정탁의 합리적인 구명 상소로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고, 28일 동안의 옥 생활 후, 백의종군 처벌을 받고 4월 1일 풀려났다. 그의 삶에서 두 번째 사형 위기였고,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렇게 풀려난 4월 1일, 이순신의 일기는 “맑았다. 원문(圓門, 감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노비 집에 도착했더니 조카 봉과 분, 아들 울, 그리고 사행과 원경이 한 자리 함께 앉아 있었다. 오래 이야기했다”고 시작한다. 사형의 위기를 넘어서 감옥을 나온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새삼스럽게 눈부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일기에는 어떤 후회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원인이야 어떻든 새로이 주어진 삶을 당당하게 살려는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고 미워하는 선조의 명을 받고, 그렇게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도원수 권율의 진영을 찾아 남행 길을 떠났다. 내려가는 길에 잠시 들렸던 고향 아산에서 그는 그의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는다. 누구보다 충성스럽고, 누구보다 위대했던 아들, 어머니 걱정에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아들 이순신이 불충한 인물로 몰려 죽을 위기를 맞아 그의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고자 여수에 피난했던 어머니가 상경 중에 배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시신을 죄인으로 안아야 했던 이순신의 마음은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까맣게 변한 듯했다(奔出踊 天日晦暗).”

그럼에도 그는 백의종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머니의 장례도 다 치루지 못하고 “일찍 나와 길을 떠났다. 어머니의 영연(靈筵)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號哭). 어찌하랴. 어찌하랴(柰何柰何). 하늘과 땅 사이에 나와 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 일찍 죽는 것만 못하구나(天地安有如吾之事乎 不如早死也)”라며 다시 길을 떠났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그렇게 자신의 업(業)을 다하기 위해 찢기고 타버린 가슴을 부여안고 길을 떠난 것이다. 그의 남행 길의 하루하루는 고통 그 자체였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 했다.

무책임한 리더 백성을 죽인다

도원수 권율 막하에 도착해 하루하루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던 그에게 비극이 전해졌다. 이순신 자신이 부산포 진격을 거부했던 것처럼, 원균도 거부하다가 결국 왕명과 도원수 권율의 명령으로 결국 부산포로 진격했다가 대열을 이탈해 도망친 경상 우수사 배설과 그가 거느린 12척을 제외하고, 전라 좌도와 우도, 원균 수하의 경상도 수군이 칠천량에서 전멸했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이 가져올 최악의 상황을 예견하고 출전을 거부했었는데, 그것이 적중한 것이다.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존(至尊)인 임금의 명령이라고, 군사를 죽이고, 패배가 예견되는 부산 진격을 거부했었다. 이순신의 그런 결정은 손자(孫子)가 말하는 “군주의 잘못된 명령은 장수가 거부할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중국 고대 사상가인 순자(荀子)도 장수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위태로운 곳인지 알면서도 명령에 따라 장졸들을 보내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하지 말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따라 적을 공격하지 말라. 군사와 백성을 속이는 명령은 거부하라”고 했다. 이순신은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는 것도 병법의 원칙이라며, 백성과 군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려고 했던 것이다.

7년 동안의 임진왜란 중, 불패의 전설을 만들어왔던 조선 수군은 임금과 일부 무책임한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전멸했다.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참으로 분통이 터졌다.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 아주 한이다”라며 가슴을 쳤다.

임금의 명령을 명령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원균에게 실행시켰던 도원수 권율은 당황했다. 이순신의 바짓가랑이라고 붙잡아야 할 상황이었다. 7월 18일, 권율은 다급히 이순신을 찾아와 난국을 해결한 지혜를 요청했다. 그 때 이순신은 권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직접 연해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대책을 정하자”고 했다. 이순신을 전임자였고, 백의종군 중에 있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듣고 대책을 찾겠다고 했다. 그런 뒤 즉시 수하 9명을 이끌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순신의 이동 소식을 듣고 과거의 부하들과 패전해 도망쳐 온 부하들, 백성들이 물밀듯 찾아왔다. 그는 그들에게 상황을 듣고 또 들으며 수군 재건 계획을 세워나갔다. 백성들은 이제야 살았다며 울부짖었고, 그는 그에게 달려오는 피난민들을 맞아 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그들의 손을 잡고 위로 했다. 자신이 한산도에서 5년 동안 이룬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자신이 온갖 고생으로 지키고 다스렸던 땅을 빼앗겨지만, 그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 장수와 군사들이 물고기밥이 되었지만, 그는 결코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12척 밖에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순간에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맨 앞에서 시련과 고난의 길을 헤쳐나갔다. 이순신은 억울하게 나라의 죄인이 되었지만,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이순신은 최악의 순간에 도망이 아니라, 가장 먼저 책임을 다했다. 백성과 부하들을 잘못을 지적하며 강요하기 보다, 먼저 그 원인 찾고 들으며 해법을 찾아냈다. 참 리더 이순신의 고통과 번뇌, 그의 발걸음을 되새기며, 각자의 삶의 주인공이 각자라는 것, 각자의 삶의 리더는 우리 각자라는 것을 다시 자각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고민해야 할 때다.

※ 본란 내용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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