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36

선비형이냐 장수형이냐 얼굴형 달라
김무생, 김명민 VS 김진규 최민식

다음 달 말에 김한민 감독이 제작한 이순신 장군 영화가 개봉된다고 한다. 《명량》이다. 최근 영화의 티저 포스터와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주인공 최민식의 두툼한 얼굴과 고뇌하는 듯하면서도 목숨을 건 듯한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간혹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 혹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유명세와 달리 실제로는 몇 편 되지 않는다. 그 영상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순신을 상상하는 감독들의 시각이나 대중이 생각한 이순신 모습의 흐름을 엿 볼 수 있다.

이순신 역할을 하면서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로는 1960년대의 영화배우 故 김진규, 1980년대 MBC 드라마에서 故 김무생, 2000년대 초반 KBS의 <불멸의 이순신>의 김명민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직 개봉 전이지만 최민식이 있다.

이들 네 사람으로 표현된 이순신을 보면, 김진규와 최민식, 김무생과 김명민으로 두 부류의 이순신으로 나눌 수 있다. 김진규와 최민식이 두툼한 얼굴에 선 굵은 장수의 모습이라면, 김무생과 김명민은 차분하고 섬세한 듯한 선비 풍모가 물씬 난다.

김명민과 최민식. 완전히 다른 두 유형의 이순신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불멸의 이순신>으로 각인된 고뇌하는 선비 기질의 김명민이 연기한 이순신의 모습이 더 익숙할 것이다. 때문에 광화문 과장에 서 있는 당당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 장비 스타일의 이순신의 모습은 오히려 불편하다.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은 최민식과 아주 비슷하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김명민과 최민식이 그린 이순신으로 인해 일반인들은 이순신의 모습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유가 있다. 물론 필자가 이순신 영상물을 제작한 감독들을 만나보지 않아 왜 그렇게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전해진 이순신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과 초상화 때문이다.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또 초상화를 기준으로 두 유형의 이순신 장군을 감독들이 각각 선택했다. 특히 초상화의 경우는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을 때 그려진 것은 없기 때문에 상상의 폭이 넓었다. 후대에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두 유형을 분류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시각에서 선택해 그렸다.

선비 얼굴 : 김무생과 김명민

먼저 이순신의 얼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이순신의 후원자였던 서애 류성룡 선생이 남긴 기록이 있다.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저술한 《징비록》에는 이순신의 모습에 대해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며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寡言笑, 容貌雅飾, 如修謹之士, 中有膽氣)”라고 했다.

류성룡의 이 표현이 훗날 이순신 장군을 상상해 그릴 때, 문신 혹은 선비 스타일로 그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일제 강점기에 여수 충민사에 소장되었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이당 김은호 선생이 그린 초상화, 현재 공인 영정인 장우성 화백의 초상화가 그 결과물이다. 또한 현대의 이순신 관련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김무생과 김명민으로 나타났다. 점잖은 선비의 모습이다.

장수 얼굴 : 김진규와 최민식

반면 태촌 고상안 선생과 백호 윤휴, 홍우원의 기록은 전혀 다른 이순신이다. 고상안은 이순신 장군과는 같은 해에 문과 급제를 했고, 임진왜란 중인 1594년 3월말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직접 만났던 인물이다. 그는 “통제사(이순신)는 동년(같은 해에 과거시험에 합격)이기 때문에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그 말의 논리와 지혜로움은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장(福將)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統制則以同年之故, 同處累日, 其言論術智, 固是撥亂之才, 而容不豊厚, 相又唇, 私心以爲非福將也)”고 한다.

고상안의 기록은 많이 야위고 극도의 피로해 몸이 엉망인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때의 이순신의 모습을 충분히 그럴 모습이었다. 고상안이 이순신 장군을 만난 시기는 전쟁이 소강상태였지만, 전염병이 창궐에 이순신의 수군도 3분의 1일 병으로 죽어가던 때였고, 이순신 자신도 병에 걸려 한창 시름할 때였다. 병에 걸려 고통당했고,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던 인물이 후덕할 만큼 통통 혹은 퉁퉁한 모습은 있을 수 없는 시기였다.

이순신의 다음 세대로, 아버지 윤효전의 소실이 이순신의 서녀였던 윤휴가 남긴 기록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윤효전은 임진왜란 당시 도 체찰사로 이순신을 후원했던 이원익과는 친구이기도 했다. 윤휴는 아버지의 소실이 이순신의 딸이었기에 이순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공(이순신)의 딸을 외부(外婦, 소실)로 삼으셨으므로, 나는 그나마 공의 집사ㆍ하인 및 공을 섬긴 사람들을 만나서 공의 용모와 기호와 모습이 어떠한 사람이었나를 물어 알 수 있었다. 공은 큰 체구에 용맹이 뛰어나고 붉은 수염에 담기(膽氣)가 있는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도 본디 비분강개하여 적을 죽이면 반드시 간(肝)을 취하였다(公長軀精勇赤髥膽氣人也. 平居素憤慨. 殺賊必取肝).” 윤휴가 이순신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들었던 이순신의 모습이다. 특징적인 것은 윤휴의 묘사를 보면, 곧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스타일의 이순신이 연상된다. 고상안이 묘사한 이순신이 병에 신음하는 이순신이었다면, 윤휴가 묘사한 이순신은 병들기 전의 이순신, 몸을 완전히 회복한 뒤의 이순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윤휴와 같은 시기의 인물인 홍우원이 남긴 기록도 있다. “팔척 장신에 팔도 길어 힘도 세고제비턱 용의 수염, 범의 눈썹에 제후의 상이다(八尺猿臂長, 燕鬚仍虎眉).” 홍우원의 기록도 윤휴가 듣고 묘사한 이순신의 모습과 비슷하다.

고상안의 묘사를 제외하고 윤휴와 홍우원이 묘사한 이순신에 대한 기록과 관련된 초상화는 현재 부산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의 그림이라고 전해지는 초상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1918년 심전 안중식이 그린 초상화, 1932년 현충사 중건 때 청전 이상범이 그린 초상화가 그 계열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도 같은 유형이다. 이들 그림들은 모두 선비 모습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서 있는 장수 이순신의 모습이다. 1960년대 김진규, 지금의 최민식은 장수 이순신 계보이다.

선비 이순신이든, 장수 이순신이든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삶과 생각이 더 중요하다. 이번에 개봉되는 《명량》은 이순신이 특히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포기’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13척으로 133척을 격파한 기적을 만든 전투가 배경이다. 최민식이 표현하는 이순신이 김명민이 표현한 이순신과는 다를지라도, 우리는 그 어떤 모습의 이순신이든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의 지독한 애국심과 애민정신을 받아들이고,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 본란 내용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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