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9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한국과 브라질의 예선 3차전의 전반전이 막 끝나고 후반전에 접어들던 지난 6월19일 오전 0씨.경기도 연천군 중면 중부전선 육군 ○○부대 소속 김종명 중위를 비롯한 부대원 25명은 최전방 초소(GP)의 경계근무 임무를 맡아 이 지역으로 파견되어 있었다.부대원들이 돌아가면서 경계근무 당번을 섰는데, 이날 오전 0시부터 김모 일병 외 1명이 초소 주변에 마련된 3개의 경계진지를 돌며 세칭 ‘밀어내기 근무’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이날 GP 야간 근무자는 모두 8명이었고, 2명씩 4개조로 편성됐다. 2개조는 오전 0시부터 2시45분까지 전반부 근무, 나머지 2개조는 이후 5시30분까지 후반부 근무였다.이에 따라 이날 오전 0시께 전반부 근무조에 편성된 김모 일병은 동료 병사와 함께 GP 건물 외곽에 설치된 경계진지에 투입됐다.

그즈음 대다수 부대원들은 콘크리트로 된 반지하 벙커인 GP내 내무반에서 막 시작된 한-브라질전의 후반전을 TV를 통해 시청하고 있었다. 승리를 바라던 부대원의 바람과 달리 브라질에 1대0으로 지고 있어 병사들은 흥분된 상태였다.김 일병과 동료 병사 1명은 축구중계를 멀리한 채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첫 번째 진지 경계임무를 마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두 번째 진지로 이동해 1시간여 경계근무를 했다.김 일병은 근무 교대 시간이 다 된 오전 2시30분쯤, 함께 근무하던 선임병에게 “다음 근무자를 깨우겠다”고 말한 뒤 내무반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급받은 3개의 탄창 중 1개를 끼워놓은 자신의 K-2 소총을 초소에 세워놓은 뒤 내무반으로 향했다. 김 일병이 내무반에 도착한 시각은 정확히 이날 오전 2시36분. 고요히 잠든 동료병사들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던 그의 시야에 평소 언어폭력을 일삼는 선임병이 자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그는 ‘욱’하고 화가 치밀었다.(국방부의 설명은 이렇다. 하지만 최전방에서 경계진지를 한 시라도 비울 수가 없고 일반적으로 상황병이나 불침번이 다음 근무자를 깨우고 이들이 진지에 도착해야 임무를 교대하기 때문에 국방부의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다음은 다른 분석.김 일병은 평소 감정이 좋지 않던 선임병 등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근무중 경계진지에서 소총을 갖고 나오면 의심을 받을 것을 우려, 탄창만 몰래 가지고 나온 뒤 내무반에 보관된 동료의 소총을 범행에 이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그럴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육군측은 김 일병이 폭언을 일삼는 선임병의 얼굴을 보고 순간 화가 치밀어 수류탄을 투척했다고 설명한 점에 비춰볼 때 김 일병에 대한 폭언 등이 집단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의 선임병 혼자 김 일병을 괴롭혔다면 이 선임병에 대한 조준사격을 했을 수 있지만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을 난사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인 것이다.) 어쨌든 내무반에 들어온 김 일병은 빠르게 행동했다. 그는 내무반 앞쪽에 나란히 세워둔 K-1 소총 중 한 정을 빼들었다.

그의 한 손에는 어느새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내무반에는 동료 전우 25명이 잠들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김 일병은 제2 안전핀을 뽑고 잠들어 있는 전우 25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쾅!…’수류탄이 터지면서 내무반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내무반을 뒤로 한 채 김 일병은 바로 옆에 있던 체력단련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김 일병은 수류탄 폭발음에 놀라 어리둥절하던 GP장(소초장) 김종명(26) 중위와 맞딱뜨렸다. 그는 김 중위를 보자마자 들고 있던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김 중위는 즉석에서 절명했다.연이은 총성에 바로 옆 상황실에 있던 후임 소초장 이인성 중위가 상황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김 일병은 또 그를 향해 총을 쐈다. 그러나 이 중위는 다행히 화를 면했다. 김 일병은 취사장에서 놀라 막 뛰쳐나오던 이모 상병에게도 소총을 난사했다.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은 이 상병은 병원으로 급거 후송됐지만 결국 숨졌다. 김 일병의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미 그의 눈은 보통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밖으로 나와 탄창을 갈아 끼운 김 일병은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가 어둠을 향해 소총을 마구 쏘았다.

이미 김 일병이 던진 수류탄과 소총 난사로 내무반에서 잠들었던 부대원 6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김 일병은 GP 북쪽에 있는 초소로 다시 향했다. 그는 다른 근무병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이미 소총에는 총알이 다 발사된 뒤였다. 이 때 상황을 잘 모르던 초소 근무병은 김 일병을 향해 “(긴급한) 상황이 발생한 것 같으니, 빨리 초소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범행을 저지른 김 일병은 자신의 근무 초소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자신의 초소로 돌아간 시각은 오전 2시45분. 김 일병이 이런 엄청난 사건을 저지를 때까지 걸린 시각은 모두 9분이었던 것이다.그 이후 김 일병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소총을 난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은 모르지만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을 후임 소초장 이모 중위는 알고 있었다. 이 때부터 이 중위의 기지가 발휘됐다.

이 중위는 범인이 군복을 입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을 연병장으로 불러 모았다. 연병장에는 전반부 근무자 4명과 상황이 발생하자 급히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병사 1명까지 포함해 모두 5명이 모였다. 일단 총기를 내려놓게 한 이 중위는 전투복을 입은 5명을 관측장교 방에 구금시켰다. 그리곤 한 사람씩 소총을 체크했다. 결국 김 일병의 소총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 일병과 같이 근무했던 선임병이 “네 총은 K-2 소총인데, 아까 올 때는 다른 총을 갖고 오지 않았느냐”고 사실을 밝혀낸 것. 이 사실을 추궁하자 김 일병은 “내가 사고를 쳤다”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김 일병이 범행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을 때 시간은 6월19일 오전 3시경이었다. 따라서 김 일병이 초소를 벗어나 범행을 저지르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20~30분 정도였다.


# 비무장지대 초소 총기난동 사건 5대 의문 완전해부

연천 비무장지대 GP총기난동 사건과 관련한 의문들이 육군의 사고조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유가족들은 육군의 발표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번 사건의 실체를 밝혀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음은 유가족들과 군사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주요 의문점.

의문1 사병 사망자는 왜 모두 상병일까

이번 사고로 사망한 군인 8명 중 소초장인 김모 중위를 제외한 7명 전원이 상병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당시 GP에는 상병이 14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일병 8명, 병장과 이병도 각 2명씩 있었다. 수류탄과 소총 난사가 있었는데, 특정 계급 병사들만 피해를 보았다는 것은 의문이다. 육군측은 “병사들이 취침 중이었기 때문에 수류탄 파편의 피해가 그나마 적었고 김 일병이 주로 상병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상병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의문2 잠자던 26명중 6명이 숨진 까닭

육군측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당시 내무반에는 26명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수류탄이 터졌지만 이 중 6명이 사망했고 2명은 내무반 밖에서 총격으로 숨졌다. GP의 특성상 비좁은 내무반과 수류탄의 위력, 총기가 난사된 상황을 감안할 때 사망자 수가 적다는 점이 의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장을 방문했던 유가족들은 수류탄 폭발로 숨진 병사는 단 1명에 불과했다는 주장까지 제기했다.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수류탄은 터질 때 45도 위쪽으로 파편이 튀기 때문에 누워 있었던 병사들의 희생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의문3 집단 따돌림 있었나

이번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가. 현재 살아남은 병사들을 상대로 군 수사당국이 조사를 하고 있어 진실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단순히 구타나 가혹행위 없이 욕설 등 언어폭력과 괴롭힘만으로 이번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다는 주장이다.구타나 가혹행위 외에 다른 충격적인 가혹행위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합동조사단 관계자는 “김 일병은 언어폭력 외에 다른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의문4 청소년축구중계방송 영향?

사건 당일 새벽 1시까지 방송됐던 세계청소년축구경기를 시청했고(이 점은 병사들도 시인했다), 축구경기 시청 후 신·구임 소대장이 합동근무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대장 환송, 환영식을 위한 회식으로 음주 등이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한 군 관계자도 당시 축구 경기 시청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2시30분 이전에 모두 내무반에서 취침 중이었고 음주 등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다.

의문5 김일병 쉽게 제압하지 못했는가

육군측의 발표를 보면 김 일병은 이날 오전 2시30분부터 43분까지 13분여 동안 내무반, 휴게실, 상황실 등을 다니며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는 등 범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10명이 사상(死傷)했지만 신임 소초장(소대장)과 경계 초소에 있던 3명을 비롯, 20여 명이 살아 있어 이들이 왜 김 일병을 쉽게 제압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다. 특히 이같은 엄청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제지를 받지 않고 다시 경계초소에 복귀할 수 있었느냐는 점도 의문이다. 이에 대해 육군조사단은 당시 북한군 공격인지 아군 소행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터여서 김 일병이 범인인 줄 몰랐기 때문에 김 일병의 초소 복귀를 방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 초기인 오전 2시39분 북한군 습격으로 상급 부대에 보고가 돼 연대 및 사단 위기조치반이 소집되고 전방 경계소초에 전 병력이 긴급 투입되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 조용히 묻혀진 총기참극 많다

8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이번 군부대내 총기난사 참극이 과거에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7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 0시 쯤. 육군 7사단에서는 선임병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방모 상병이 수류탄 8발을 터뜨려 7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파주시에서도 사건이 터졌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81년 3월 28일 파주의 최전방 GP에서는 가정문제로 심적 갈등을 겪던 이모 이병이 불침번을 서던 중 총기 난동을 부려 상병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 84년 6월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 초소에서는 조모 일병이 수류탄 3발과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13명의 병사가 숨지고 9명의 병사가 중상을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같은해 7월 울산의 한 해안부대에서는 하사관이 총을 난사해 5명이 사망했다.그러나 놀랍게도 이들 사고는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 세상에 묻힌 채 조용히 수습되었다는 것이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때문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묻혀져버린 군대내 총기관련 사고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주장이 다시금 설득력을 얻고 있는 추세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는 이번 사고가 발생한 같은 사단 예하 모 부대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22일 군 관계자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85년 2월 24일 새벽, 교대 근무를 마친 박모 이병이 내무반으로 들어가 소총 수십발을 난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박이병은 선임병 3명에게 폭행과 기합을 받은 것으로 인해 ‘사고’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탄약고에서 탄약을 훔친 박이병은 취침중이던 동료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가했다는 것. 이 사건은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대형사고로 이어졌다.

놀라운 사실은 이번 사건과 20년 전에 발생했던 사건이 여러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이다. 우선 사망자의 수가 8명이라는 점과 사고 시점이 일요일 새벽이라는 점에서 같다. 또 평소 내성적이던 박 이병이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인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범행의 동기도 이번 김일병의 경우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사고가 일어난 부대가 같은 28사단이라는 점도 같다.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이번 사건으로 인한 파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군부적격자에 대한 심사 및 구석기적인 군대 문화에 대한 개선,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사들의 군기문란 문제는 앞으로 많은 논쟁거리를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질 경우 군의문사진상규명에도 새로운 길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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