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40

한중(韓中)관계의 이정표가 될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이 방한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전례 없이 존경을 받고 있는 지도자의 당당하고 묵직한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 스스로 당당하되 자만하지 않고(自豪不自滿)
드높게 일을 추진하되 떠벌리지 않고(昻揚不張昻)
실질에 힘쓰되 조급해하지 않는다(務實不浮躁).

이 시는 시진핑의 좌우명이다. 신중한 리더, 겸손한 리더가 되려는 자세가 나타난다. 시진핑의 방한 이후의 행동에서 그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좌우명’이 아니라, 좌우명을 생활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다. 지금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탄탄하게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 이후의 중국은 전성기 중국을 상징하는 제2의 ‘당(唐)나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

리더의 자세는 조직의 성패와 직결

새로운 중국을 이끌고 있는 시진핑과 달리, 우리 사회에는 그런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최악의 모습도 보았다. 우왕좌왕하고, 먼저 도망치는 무책임한 리더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만든 참혹한 비극들이 계속 일어났다.

임진왜란 중에도 수많은 비겁한 리더들이 있었다. 조선군이 대패한 용인전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1592년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5만의 조선군이 1,600명의 일본군에 참패했다. 이일과 신립의 패배 이후인 5월 3일 한양이 일본군에 점령당한 뒤 일본군의 허리를 끊으려던 상황에서 도리어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전라순찰사 이광(李洸), 경상순찰사 김수(金 ),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 등은 전라도군 4만 명, 충청도군 8천명, 경상도군 1천명 등 약 5만 명으로 한양을 탈환하려고 했다. 엄청난 규모의 조선 군대를 본 수원 독성산성의 일본군은 용인으로 후퇴했다. 급보를 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한양에서 1,600명을 이끌고 용인에 도착했다.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향후 전략에 대해 토론을 했지만 광주목사 권율(權慄) 등이 제안한 전략, 적이 험한 곳에 위치해 공격하기 어려우니 소수의 적군과 대결하지 말고 임진강에서 막자는 전략 대신 용인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李之詩)와 곽영(郭嶸),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에게 각각 군사 1천 명을 주어 일본군을 공격하게 했다. 조선군 선봉대는 일본군이 소수인 것을 보고 가볍게 여겨 먼저 공격했다. 일본군은 거짓 후퇴를 하고 있다가 조선군 선봉대를 기습을 했다. 백광언과 이지시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다음날 아침, 어제의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조선군이 밥을 지을 때 와키자카의 일본군 기병대가 기습을 했다.

충청 병사 신익(申翌)이 먼저 도망하자 5만 명의 조선군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했다고 한다. 이광과 김수, 윤국형 등도 30리 밖에 있었지만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도망갔다. 삼도연합군 5만 명이 1,600명의 일본군에 대패당했다. 용인 전투의 패배는 리더의 잘못된 판단, 경거망동, 겁많은 리더들의 도망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였다.

그러나 용인전투에서 대승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에서의 대승에 따른 교만심으로 한달 후인 7월 8일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했다.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의 리더들은 최악의 리더십, 실패하는 리더의 모습을 전부 보여준 사례이다.

위기에 강한 리더 태산과 같다

이순신은 달랐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이순신은 첫 출전을 하면서 사도 첨사 김완과 여도 권관 김인영을 척후대로 보냈다. 적선을 발견한 김완 등은 신기전을 쏘았다. 이순신은 출전 직후 원균을 만나 일본 수군의 적선 수와 정박한 곳, 접전 방법 등을 협의했었다. 또한 자신의 부대 장수들과 원균의 부하 장수들과 몇 차례 명확하게 전투방법을 알려주고 단단히 약속했었다. 이순신의 수군은 한 번도 일본 수군을 본적이 없었다. 때문에 일본 수군의 등장을 알려온 신기전은 조선 수군들을 두렵게 하고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그 때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에게 엄하게 명령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그리고는 일본군이 있는 옥포를 향해 대열을 지어 들어갔다. 이순신의 지휘하에 조선의 전 수군은 모두 힘을 합해 일본 전선을 포위하고 “바람과 우레같이(急如風雷) 총통과 활을 쏘아 댔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포로였던 백성들도 구출할 정도였다. 이순신의 신중한 태도와 질서정연한 전투 방법이 마구잡이로 적군을 죽이지 않고, 백성까지 구출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순신이 말한 ‘산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靜重如山)’와 ‘바람과 우레같이 공격하라(急如風雷)’는 것은 병법서들에서 요구하는 리더의 자세, 리더십의 모습이다.

특히 《손자병법》에서는 “전쟁은 속임수로 이뤄진다. 이로움으로 택해 움직이고, 분산과 집중으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때문에 빠르기는 바람과 같고(其疾如風), 고요하기는 숲과 같고(其徐如林), 적을 공격할 때는 불같고(侵掠如火), 나를 지킬 때는 산처럼 움직이지 않고(不動如山), 어둠 속에 숨은 것처럼 하며(難知如陰), 움직이면 천둥번개처럼 해야 한다(動如雷震)”고 했다. 이순신이 말한 ‘산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靜重如山)’와 ‘바람과 우레같이(急如風雷) 공격하라’의 전술 근거이다.

또한 다른 병법서에서도 손자의 주장과 같은 주장을 한다. 《삼략》에서는 장수가 경계해야 할 네가지 행동으로 첫째, 장수가 생각이 깊지 않으면(無慮) 지혜로운 선비들이 떠나가 버린다. 둘째, 장수가 나약하여 용기가 없으면(無勇) 사졸들이 적을 두려워한다. 셋째, 장수가 경거망동하면 그 군대는 신중하지 못하다(將妄動, 則軍不重). 넷째, 장수가 분노를 못이기면(遷怒) 온 군대가 두려움에 떨게 된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평상시 각종 병법에서 말하는 장수의 신중한 태도와 결정에 따른 신속한 행동을 단련했기 때문에 위기를 맞아서도 일본군의 출현을 보고받자 한마디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했고, 그 행동은 ‘바람과 우레같이 공격’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태도는 용인전투 혹은 그 전의 이일이나 신립과 크게 다른 것이다. 실패하는 리더처럼 교만하거나 스스로 착각에 빠지 않았다. 냉정하게 상황을 관찰하고 숙고하며, 경청하면서 사태에 대응한 것이다. 때문에 이순신은 《손자병법》등에서 말하는 완전한 승리(全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태로울수록, 위험에 처해 있을수록, 혼란스러울수록, 처음 길을 갈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첫걸음부터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하고 생각한 뒤 걸음을 떼어야 한다. 두려움은 경거망동할 때 더욱 심해지고, 위태로움은 두려움의 결과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본란 내용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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