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테러 예고인가, 단순 시위성 협박인가.’ 지난 12일 김영삼 전대통령을 겨냥, 김 전대통령이 명예위원장으로 있는 자유북한방송 옛 사무실 앞에 누군가가 칼을 꽂은 인형과 함께 협박 유인물을 남기고 간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최초 목격자에 따르면, 과일 칼이 꽂힌 채 피 범벅이 돼 있는 길이 25cm의 인형이 유인물과 함께 자신의 집 문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 유인물에는 “김영삼이가 계속 망발을 한다면 상자 속의 인형처럼 될 것임을 경고한다”라는 내용 등이 씌어져 있다는 게 목격자의 전언이다.

그렇다면 김 전대통령의 망발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유북한방송 김성인 국장은 “실제로 김 전대통령은 지난 4월 열린 민주주의이념연구회 창립대회에 참석, 김정일 독재정권에 대한 심한 비난을 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강력계에서 수사를 전담했으나 최근 보안계로 넘어가 수사가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고 대상이 김 전대통령이라는 이유에서다. 또 ‘테러경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장이 오그라든 공포감

“소포 틈새로 희미하게 보이는 정체모를 인형을 보는 순간, 심장을 오그라뜨리는 공포가 밀려왔다.” 지난 14일 만난 최초 목격자 배모(38)씨는 당시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배씨에 따르면 그가 인형과 유인물을 처음 본 것은 지난 12일 새벽 3시께. 야근하는 남편과 함께 동네 포장마차에서 야식을 먹고 오던 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집 문 앞에 하얀 플라스틱 김칫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이벤트 선물을 갖다 놓은 줄 알았지만 순간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안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범벅이 돼 있는 사람 모양의 인형과 유인물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인형의 목 부근에는 과도가 꽂혀 있었고, 유인물은 A4용지 반 크기로 2장이 포개져 있었다.” 그는 “내가 목격한 ‘문제의 인형’은 공포영화의 대명사인 ‘사탄의 인형’보다 섬뜩한 정도가 훨씬 심했다”며 당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배씨는 또 “유인물에는 ‘김영삼이 계속 망발을 한다면 상자 속의 인형처럼 될 것’이라는 경고문구가 씌어 있었다”며 “결국 이 인형은 YS를 겨냥한 ‘밀랍인형’이었던 셈”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유인물의 서두에는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 모 건물 5층’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배씨는 “이 주소는 자유북한방송의 옛 주소”라며 “누군가 바뀐 주소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이전 주소에 놓고 간 것 같다”고 추측했다.

한편, 배씨의 어머니인 정모(62)씨에 따르면 이 소포는 배씨 내외가 발견하기 불과 1시간 전인 새벽 2시에 ‘누군가’가 놓고 갔다고 한다. “사건 당일 새벽 2시에 잠시 잠이 깼었다. 그때 (5층임을 알리는)엘리베이터 소리를 들었다. 당시에는 ‘얘들(딸과 사위)이 지금 들어오나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이 때 범인이 소포를 놓고 간 것이라고 추정된다.”

YS 활동반대단체 소행(?)

그렇다면 ‘잘못된’ 주소로 ‘공포의’ 소포를 갖다 놓은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사건을 맡고 있는 양천경찰서 보안계 수사진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지난 2004년 탈북자동지회 당시 명예회장이자 북한 전 노동당 비서였던 황장엽씨에 대한 살해 협박 사건과 유사하다. 황씨는 지난 2004년 3월 그에 대한 살해위협을 담은 유인물 10여장과 흉기를 꽂은 사진 등으로 신변에 위협을 받은 바 있다.

경찰은 “당시 문제됐던 모 단체뿐 아니라 최근 김 전대통령의 활동에 대해 반대해왔던 단체 등을 수사 중”이라며 “또 현장에 있던 인형과 유인물을 수거, 국과수에 지문 감식을 의뢰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번 협박사건 관련, ‘YS테러’ 여부에도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국장은 “이전한 주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우리 방송사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단순히 누가 심부름 시켜서 전달한 사람일 것”이라며 “아마도 범인이 공식적 신분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했다.

북한 측 관계자일 것이라는 얘기. 이같이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김 국장은 “김 전대통령이 경고, 비난 등의 협박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04년 10월 김 전대통령이 자유북한방송의 명예위원장을 위임받은 이후 줄곧 북한 인터넷 사이트인 ‘구국전선’으로부터 숱한 압력을 받아왔다.일례로 ‘구국전선’은 “변신과 배신을 ‘밥 먹듯’ 하고 친미와 매국의 공을 쌓은 덕에 대통령 벙거지를 썼던 김영삼이 이제는 사이비방송의 더러운 명예직까지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치매춘부인 역적특유의 역겨운 추태”라고 힐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명색이 대통령을 해먹었으면 하다못해 자그마한 자선단체 명예직이라면 몰라도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인간오물장의 명예직 따위를 차지하고 민충이 쑥대에 올라선 듯 기고만장해 돌아치고 있는 것을 보면 김영삼 역도의 몸값이 원래 어느 정도였는지 알고도 남음”이라는 등 빈축하기도 했다는 게 김 국장의 설명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 김국장은 최근 이 같은 협박을 받을 만한 행위나 발언을 한 적 있는지 등 여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테러경고여부에 ‘촉각’

그는 “김 전대통령은 지난 4월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민주주의이념연구회 창립대회에 참석, ‘김정일 정권은 총칼을 앞세워 주민을 억압하고 광신적인 세뇌로 체제를 유지하는 폭력집단’이라며 ‘다 죽어가는 김정일 독재정권을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지금까지 연명시킨 것은 역사적 죄악’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이후 몇몇 공식행사에 참석, 북한 측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도 전했다. 마지막으로 김 국장은 “이 같은 협박 사례는 자유북한방송 관계자 모두가 겪는 고충”이라면서도 “하지만 나라의 전 대통령이었던 분을 겨냥, 유인물 뿐 아니라 공포인형까지 소포로 보낸 것은 가히 충격적이고 긴장해야 할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김 전대통령에 대한 협박 사건을 둘러싸고 여전히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이 사건이 ‘일종의 테러 경고’인지 ‘단순 협박’인지에 대한 논란은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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