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첫 언급…신빙성 떨어져

일본 해군 중장 “이순신, 동서 해군장수 중 ‘으뜸’”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은 신화이다. 이순신은 13척의 전선(戰船)으로 133척의 일본군 전선과 겨뤄 30여 척을 격파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승리이다. 명량의 기적을 만든 원인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그 첫째 요인으로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을 꼽는다. 그 외 중요한 요소로는 조선의 전선이었던 판옥선의 우수성, 함포의 우수성 등이 있다. 그와 관련해 최근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철쇄(鐵鎖, 쇠사슬)를 이용한 전술이다. 명량해협 양편에 말뚝 혹은 기둥을 박아놓고 철쇄를 설치해 놓고 일본 전선이 지나갈 때 잡아당겨 일본 전선을 뒤집히게 했다는 것이다. 

최근까지 철쇄설에 대해 누구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해남과 진도에도 구전설화로 철쇄 이야기가 전해졌고, 그 흔적도 1980년대까지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철쇄설을 부정한다. '구전설화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원균이 7월 칠천량에서 대패한 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지만, 명량해전까지 불과 2개월 정도의 시간 밖에 없었고, 『난중일기』에 기록된 명량해전 당일의 일기에도 철쇄로 작전을 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즉 명량해협에 철쇄를 설치할만큼 물리적 시간이 없었고, 소수의 패잔병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설치할 인력이나 기타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철쇄설이 등장했을까. 현재까지 확인된 역사 사료에서 명량해전 철쇄설이 등장한 최초의 사료로는 임진왜란이 160년 정도 지난 뒤에 나타난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1751년에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이다.

▲ 해남현 삼주원에서 돌맥(石脈)이 바다를 건너 진도군이 되었는데 물길로 30리 이며 벽파정이 그 입구다. 삼주원에서 벽파정까지 물속에 가로 뻗친 돌맥이 다리(石梁) 같으며, 다리 위와 다리 밑은 끊어 지른 듯한 계단으로 되었다. 바닷물이 이곳에서는 동으로부터 서쪽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같이 아주 빠르다. 왜적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므로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 위에 머물러 철쇄를 돌맥이 다리 위에 가로 걸고 적을 기다렸다. 왜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철쇄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이 보지 못하므로 배가 너머 진 줄은 모르고 다리를 넘어갔으려니 하고 순류로 곧장 내려오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 버렸다.

그러나 이중환은 『택리지』를 저술할 때 "전라도와 평안도는 내가 보지 못했다"고 했고, 이중환이 귀양을 갔던 곳도 경상도의 어느 섬과 함경도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중환도 누군가에게 철쇄설을 듣고 기록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중환 이전의 기록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 조선 후기의 베스트셀러였던 『택리지』가 퍼져나가면서 그 후 철쇄설은 다른 기록들에도 영향을 미쳐 명량해전 철쇄 신화가 생겨나게 된다. 1799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서는 명량해전 당시의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 1548~1618)의 활약으로 나온다.

그 후 김억추의 후손들이 1914년 간행한 김억추 자신이 썼다는 『현무공실기』에 다시 김억추의 활약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호남절의록』보다 앞선 시기에 호남의 실학자였던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1784년에 쓴 <김억추의 묘갈명>에는 철쇄설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로보면 김억추의 철쇄 설치설은 『호남절의록』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철쇄설은 그와 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그러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이었던 일본의 기록은 어떨까. 명량해전을 기록한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기록은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이 거의 유일한 듯하다. 그러나 이 기록에도 철쇄설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18세기 이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관련한 무용담들인 『조선군기(朝鮮軍記)』, 『회본태합기( 本太閤記)』 등에도 철쇄설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변화가 생긴다. 조선을 재침략하기 위해 일본은 우리나라의 문헌을 통해 우리나라의 지리와 역사·문화 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1888년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은 대표인 조선 탐구서이다. 전체 8권의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 바로 철쇄설이 처음 등장한다. 8권 <전라도편>에 나온다. 이중환의 『택리지』속의 철쇄설이 그대로 언급된다. 『조선지지략』을 저술할 때 『택리지』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팔역지』는 『택리지』의 다른 명칭이다.

그 후 일본 해군 전문가가 최초로 명량해전을 언급한 것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부하로 러일전쟁에도 참전했던 일본 해군 중좌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가 1904년에 저술한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日本帝國海上權力史講義)』이다. 그 책에서도 철쇄설이 언급되고 있는데, 앞의 『조선지지략』과 거의 유사하다.

일본 근현대 문헌 속의 철쇄설은 『택리지』에 뿌리를 둔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지략』이 그 출처이다. 명량해전 철쇄설을 우리나라와 일본 문헌을 통해 살펴보았듯, 철쇄설은 임진왜란이 끝난뒤 160년이 지난 18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했고, 그 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구전설화로 확대재생산된 것이다.

일본에 전해진 철쇄설과 관련해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는 신화와 전설처럼 알려진 철쇄설을 일본에서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전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점이다. 이순신을 "불세출의 명장" 혹은 "절대적인 명장이자 진실로 동서 해군장수 중 제1인자"라고 평가했던 일본 해군 중장(中將) 사토 데쓰타로(佐藤鐵太郞, 1866~1942)는 <절세의 명(名) 해군 장수 이순신>이라는 글에서 명량해전 철쇄작전설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또한 방어용 무기를 공격용으로 바꾸어 사용한 지장(智將)이기도 하다. 러일전쟁 때 아군(일본군)이 방어용 수뢰를 공격무기로 전용하여 러시아 기함 페트로 파블로프스크(Petropavlovsk)함을 폭침시키고 러시아의 마카로프(Stepan Osipovich Makarov) 장군을 죽게 한 것은 흥미롭고 독창적인 전술 덕분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은 5400년 전에 이미 이와 똑 같은 기계(奇計)를 사용해 대성공을 거두었다”라며 철쇄설을 언급하기도 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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