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소·이원종 경질은 문민정부 몰락 전주곡

청와대에서 현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던 민모 비서관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안기부로 자리를 옮겼다. 게다가 문민정권은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인물들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했다.

정권 초기부터 박태중을 비롯한 김현철의 측근들이 발호하고 있다는 첩보가 끊임없이 올라 왔다. 내가 근무할 당시에 이미 “청와대 제1 부속실장이던 장학로가 주는 대로 덥석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다가 그는 곧 큰 사고를 쳤다. 오정소 실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오 실장이 바깥에 나가 만나는 사람도 많은 것처럼 보였다. 내방객이 찾아오면 주로 내가 정문으로 나가 에스코트를 하는 일이 많았다.

문민정권의 초대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내정됐다가 낙마한 전병민이란 사람도 오 실장을 자주 찾아오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개혁의 전령사 역할을 했던 일명 ‘동숭동팀’의 팀장이었다. 김현철씨의 최고 핵심 측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와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마도 권력 내부의 이너서클 문제를 서로 의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김현철씨의 전화를 여러 번 연결해 주기도 했다. 그는 전화할 때마다 “여의도 김소장입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부속실 생활을 시작한 초기에는 ‘여의도에 무슨 군인이 있어 여기로 전화를 하냐?’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의도 사무소의 김현철 소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장학로 부속실장에 관한 소문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전화 매너만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말도 자근자근 신사적으로 했고 나 같은 하급 직원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한참 후 그가 한보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떠밀려 구속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그가 억울해 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이 나온 김에 김현철의 인맥을 둘러 싼 이야기를 좀 더 소개해 보겠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에는 지옥에까지 지부가 설치되어 있는 3대 패밀리가 있다"고들 한다. 바로 해병대전우회와 고대동문회 그리고 호남향우회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 중에서 문민정부 시절에는 고대동문회가 힘을 썼다. 고대 출신이면서 특히 경복고 출신인 사람들은 성골이었다. 경복고 출신들은 은어로 ‘케이투(K2)’라고 불렸다. 아마 일제 때 경기고가 경성 제1고보(K1)였던 데 이어, 경복고가 경성 제2고보(K2)였던 데서 연유한 것 같았다. 김영삼 정권을 PK정권으로 보는 것은 조금 잘못 본 것이다. 물론 숫자상으로는 경남, 부산 출신이 많이 중용되었지만, 그들은 육두품들이었다. 기껏해야 진골이었다. 문민정권의 핵심 실권은 모두 경복고와 고대 출신들이 좌지우지했다.

이에 비해 김대중 정권 때에는 호남향우회가 모든 것을 독차지했다. 양 정권의 차이점이라면 김영삼 정권 때에는 ‘눈치껏’ 지역안배를 하는 시늉이라도 냈지만 김대중 정권에서는 그나마 ‘눈치껏’ 하는 것조차 과감하게(?) 포기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문민정권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김영삼 정권은 김현철을 중심으로 한 경복고/고대 세력과, 부산/경남고 세력 간의 알력 때문에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당시 청와대 안에서는 이원종 정무수석과 김광일 실장이 사사건건 부딪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 실장도 김현철 일파에 의해 밀려 났다. 내가 언론에 밝혔듯이, 박관용 실장은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 먹으면서 대화한 내용이 미림의 도청에 걸려 전격 경질되었다. (주간동아 2005. 8. 2 자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도 도청했다" 제하 기사 참조)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초 김현철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 될 즈음에 가서야 여론에 밀려 경복고/고대 세력의 중심이던 이원종 씨를 잘랐다. 이 수석은 별명이 ‘핏대’라고 불릴 정도로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핏대를 올렸다고 한다. 기자들을 그를 “혈죽(血竹) 선생"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청와대 성골 vs 진골 대전쟁

이원종 씨가 잘리기 바로 직전 1996년 12월 사실은 오정소 실장이 먼저 잘렸다. 오 실장은 연합통신에 기사가 나기 10분 전에 전격적으로 경질을 통보 받았다고 한다.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YS의 친구였던 고 김윤도 변호사가 청와대에 들어가 “오정소를 잘라야 된다"고 강력하게 건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아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오정소 실장은 퇴임인사 차 부내를 순시하면서 고대 후배인 박모 정보비서관에게, “성O야 새로 오는 XX하고 잘해 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정소 실장이 말한 ‘새로 오는 XX’는 박일룡 경찰청장이었다. 박일룡 청장은 부산 세력의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오정소 실장과 박일룡 청장은 현직에 있을 때 서로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오 실장과 이 수석의 경질은 문민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전주곡이 되었다. 문민정권의 마지막 해인 97년 1월 여당은 안기부법 개정안과 금융개혁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려다 여론에 밀려 실패했다. 이 와중에 한보와 기아사태가 터져 나왔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나라의 경제는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국가부도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김영삼 정권은 점차 정국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갔다. 레임덕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식물정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김현철의 국정농단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었지만 아무도 정권을 방어하려고 총대를 메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박일룡 청장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김현철을 난타하던 언론이 “예전 같으면 안기부가 보도 수위를 적절히 조절해 줬는데…"라며 의아해 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영삼 정권이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지면서 나라는 외환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나는 이를 권력의 공백이 가져 온 비극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