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당한 그녀 머리엔 검은 비닐봉지가…”

영화 의 한장면.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련없음 -

충북 청주에 ‘제2의 강호순’이 활보하고 있다. 지난 2월 1일 김모(57)여인이 실종 보름여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지만 경찰은 사건 발생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범인의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김 여인이 실종되던 날 밤 야간근무를 마친 그가 신원미상의 남성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탄 장면이 지역 CCTV를 통해 포착됐지만 전담팀의 수색에도 범인은 완전히 모습을 감춘 상태다. 일각에서는 경기도 일대를 주무대로 살인행각을 이어갔던 강호순이 검거 직전 인근 청주까지 내려와 원정살인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그러나 김 여인의 몸에서 발견된 용의자의 흔적은 강과 일치하지 않았다. 즉, 강의 범죄행각을 고스란히 베낀 ‘제2의 강호순’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궁 속에 빠진 ‘청주 50대 주부 살해사건’의 모든 것을 분석해봤다.

사건을 담당한 청주 흥덕경찰서는 당초 김 여인의 사인을 자살로 추정했다. 김 여인의 몸에 특별한 외상이 없이 목이 졸린 흔적만 남아있었던 것. 또 김 여인에게 2000만원 상당의 빚이 있었고 채무자들로부터 빚 독촉에 시달렸다는 정황도 포착된 까닭이다.


“용의자와 성관계 확실, 강간 여부 확실치 않아”

그러나 김 여인의 주검이 발견된 당시 상황은 자살 흔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휴대폰과 핸드백 등 실종 당시 들고 있던 김 여인의 소지품이 전혀 없었고 시신에는 신발조차 신겨져 있지 않았다. 이는 누군가 김 여인을 제3의 장소에서 살해하고 시신을 발견 장소로 옮겼다는 뜻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김 여인의 얼굴을 가린 검은 비닐봉지의 존재다. 경찰에 따르면 김 여인의 시신은 대전시 대덕구 신탄진동 모 체육공원 근처 풀숲에서 발견됐다. 한 겨울이었지만 김 여인은 코트조차 입고 있지 않았고 신발은 없었지만 양말은 비교적 깨끗했다.

반듯하게 누운 김 여인의 얼굴엔 검은색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고 목에는 끈으로 졸린 흔적이 발견됐다. 범인이 김 여인의 얼굴을 가린 뒤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다.

결국 김 여인이 살해됐다는 결정적인 정황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가 벌인 시신의 정밀 부검 결과 드러났다. 지난 2월 24일 공개된 국과수 부검결과에 따르면 김 여인의 시신에서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타액과 정액이 검출됐다.

김 여인이 죽기 직전 용의자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얘기다. 경찰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 여인이 용의자와 반강제적으로 관계를 가졌는지, 아니면 두 사람이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가졌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만약 김 여인이 용의자와 합의 아래 성관계를 가졌다면 적어도 두 사람이 면식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김 여인의 몸에 특별한 외상이 발견되지 않은 점도 면식범에 의한 범행이라는 추측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또 범죄전문가들에 따르면 범인이 피해자의 얼굴을 가린 뒤 살해하는 것은 면식범에 의한 살인사건의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다.


‘헛방’ 날린 경찰, 매복형 살인마 키웠나

김 여인 사건이 예상 밖으로 장기화 되자 가장 난감한 것은 역시 수사를 담당한 경찰이다. 당초 경찰은 김 여인에게 빚이 있었다는 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김 여인이 빚 독촉에 시달리다 가출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결론낸 바 있다.

그러나 유족들은 “겨우 2000만원 정도의 빚은 고인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여력이 있다. 또 그 정도 돈은 다른 가족들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며 자살 가능성을 일축했다. 문제는 타살 정황이 속속 드러난 가운데 경찰의 ‘헛방 수사’가 용의자의 도주를 도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특히 김 여인이 실종 당일 청주시 가경동 버스정류장에서 신원미상의 남성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는 CCTV 분석 결과는 이 같은 경찰의 허술함을 꼬집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경찰의 아날로그적 수사가 강호순과 같은 패턴의 ‘매복형 살인마’를 키웠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강호순 검거 이후 충북지역에도 장기미제로 남아있는 부녀자 실종, 살해사건이 적지 않아 ‘충북판 강호순’이 있을 것이란 주장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05년 2월 충북 청원군 버스정류장에서 40대 주부가 실종된 뒤 생사가 묘연하다. 또 같은해 8월 충북 충주에서 70대 어머니와 40대 딸이 집에서 한꺼번에 살해됐지만 사건의 실마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이에 앞서 2002년 5월 충북 진천에서는 9살이던 강모양이 귀가 길에 실종됐지만 경찰은 단서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강호순이 저지른 ‘경기 서남부 살인사건’과 유사한 사례가 충북지역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 사건 읽기 - 매복형(Ambusher) 살인마

범죄전문가 로스모(Rossmo)가 연쇄살인의 유형을 구분한 1996년도 논문에 근거한 용어다. 연쇄살인의 유형을 크게 6가지로 구분한 로스모는 사냥꾼형, 밀렵형, 끌낚시형, 올가미형, 맹수형, 스토커형, 매복형 등으로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구분했다.

이 중 매복형은 범인이 통제할 수 있는 장소. 즉 거주지나 작업장 등으로 피해자를 유인해 공격하는 범행 유형을 말한다. 자신의 원룸에서 피해자를 살해한 유영철이나 자신의 차로 피해자를 납치해 살해한 강호순 등이 매복형 살인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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