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만 달러 뜯어가고 살인누명 씌운 그녀는…”

(왼쪽상단) 필리핀 가정부 살해범으로 지목된 조씨. (SBS방송캡쳐)

2005년 11월 25일 새벽. 마닐라 시내의 고급 아파트에서 현지인 A씨(당시 26세)가 머리에 총상을 입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피해자는 해당 아파트에 고정된 가정부로 드러났다. 필리핀 현지 경찰은 사건발생 4시간 뒤인 같은 날 아침 9시 경 용의자를 검거했다. 붙잡힌 인물은 프랑스 외인부대인 ‘레종 에트랑제’ 출신 다니엘 조(한국명 다니엘 조)씨. 그가 검거된 데는 숨진 가정부의 고용주인 한국인 여사장의 진술이 유력한 증거가 됐다. 조씨의 소지품 가운데 집주인이 도난 품목이라고 신고한 시계와 진주목걸이 등이 발견된 까닭이다. 한편 조씨는 여사장의 개인 경호원으로 알려졌다. 이후 살인·절도혐의로 3년 9개월 째 필리핀 현지 교도소에 구금돼 있는 조씨. 그러나 정작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지난 9일 SBS ‘뉴스추적’을 통해 소개된 조씨의 사건은 그가 살인사건의 진범이 아니라는 다양한 정황을 증명했다. 그리고 <일요서울>의 추가 취재결과 조씨는 자신을 살인범을 지목한 진모 여인(방송에는 장 여인으로 알려짐)에게 8만 달러(약 9700만원)를 투자한 채무자로 밝혀졌다. 더구나 진 여인은 필리핀 마닐라 현지에서 카지노 사업에 관여하며 다수의 한국인으로부터 거액의 투자금을 받고도 배당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는 등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전해졌다. 진 여인은 가정부 살인사건 이후 필리핀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의 주장대로라면 고용주인 진 여인이 경호원인 자신에게 1억원 가까운 거금을 뜯어낸 뒤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 일련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다. 반면 진 여인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 진 여인은 조씨가 자신의 정식 경호원도 아니었으며, 지인의 부탁으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그를 돌봐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조씨가 ‘돈을 노리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신 앞에서 고백했다고도 말했다. 처참하게 피살된 필리핀 가정부의 주검을 사이에 두고 한국인 남녀 둘이 치열한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건발생 4년여가 지나도록 이 사건은 국내 언론과 수사팀의 관심 밖이었다.

살인·절도 누명을 쓰고 투옥된 조씨는 직접적인 증거가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4년여 동안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는 얘기다.

지난 9일 국내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조씨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방마저 ‘임대’해야 하는 필리핀 감옥에서 그는 가족들과도 연락이 끊긴 채 현지 봉사단체를 통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조씨는 자신이 무죄라는 진실을 알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조씨를 직접 면담한 본지 취재원은 “조씨가 ‘진 여인이 국내 방송과 인터뷰에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자신을 망치려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고 전했다. 이렇듯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게 맞서 있다.

조씨와 진 여인 사이에 오간 공방의 핵심은 ▶조씨가 진 여인이 관여한 카지노 사업에 8만 달러를 실제 투자했는지 여부와 ▶진 여인의 경호를 담당했다고 주장하는 조씨의 정확한 신분, 마지막으로 ▶진 여인이 도난당했다고 주장하는 물건들을 정말 조씨가 훔쳤는지 등과 관련된 사항이다.


“차키 도난? 진 여인이 열쇠 줬다”

조씨는 프랑스 외인부대로 근무하며 모은 8만 달러를 모두 진 여인에게 맡겼다고 주장했다. 본지 취재에 따르면 진 여인은 당초 조씨에게 투자금을 받는 조건으로 매달 투자금의 10%를 이자조로 지불하기로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정황은 국내 외사국의 내사결과 드러났다.

진 여인은 이에 대해 방송 인터뷰에서 “조씨는 돈 한 푼 없이 필리핀으로 들어왔다”며 일체의 의혹을 부인했다.

오히려 그는 지인의 부탁으로 조씨를 보호했으며 정식 경호원으로 고용한 것도 아니라고 항변했다. 오갈 곳 없는 조씨를 같은 동포라는 이유로 맡아 수개월간 용돈을 줘가며 보살폈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씨는 “진 여인이 잃어버렸다는 차 키도 사실 그가 내게 준 것”이라며 반박했다. 진 여인은 가정부가 살해되던 당일 명품 손목시계와 진주목걸이, 외제 승용차를 잃어버렸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필리핀 현지 경찰은 공항에서 붙잡힌 조씨의 소지품에서 손목시계와 목걸이, 승용차 키와 주차증을 발견했다. 이것은 모두 조씨가 살인·절도를 저질렀다는 물증으로 인정됐다. 하지만 조씨에 따르면 손목시계와 목걸이는 남동생의 결혼선물로 백화점 좌판에서 구입한 ‘짝퉁’이며 승용차 키는 진 여인이 자신과 또 다른 경호원에게 맡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취재결과 문제의 차는 진 여인과 함께 일한 직원 대부분이 키를 받아 사용한 ‘공용 차’인 것으로 확인됐다. 더구나 차량이 발견된 주차장 입차 기록과 조씨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주차증의 필체, 일련번호 등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누군가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얘기다.

현지 교포와 외사국 수사관들에 따르면 필리핀 현지에서는 돈으로 사건 기록을 조작하거나 담당 경찰을 매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건을 접한 국내 수사관들 사이에서는 일련의 정황과 증거물을 바탕으로 볼 때 조씨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것이란 견해가 적잖이 쏟아지고 있다.


“진 여인, 다른 남성에게도 거액 투자금 받아”

한편 본지 취재결과 진 여인은 조씨 이외에도 한국인 남성 박모씨로부터 거액의 투자금을 받은 뒤 이를 돌려주지 않아 피해를 입혔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 경찰청 외사국 관계자는 “필리핀 현지에서 확인한 결과 진 여인은 동포들을 상대로 투자금을 유치한 뒤 배당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는 등 물의를 일으킨 인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박모씨 등 진 여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증언을 확보했으며 이달 안에 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가 사건을 이첩해 수사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누명을 쓴 청년의 억울한 옥살이인가, 아니면 철저히 혐의를 발뺌하는 살인범의 농간인가. 20대 필리핀 가정부의 살인사건으로 대두된 한국인끼리의 이전투구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외국인 범죄단체 막아라” 분주한 경찰

우발적 단독범죄에서 조직범죄로 진화

최근 우발적 단독범죄 위주로 발생했던 외국인 범죄가 조직적인 단체범죄로 반전하고 있어 경찰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미 러시아 마피아와 중국 삼합회 아류 조직이 국내에 다수 흘러들어왔다는 정황이 포착된 이상 이들 조직의 행보를 철저히 주시해야하는 상황이다.

지난 6월말 베트남 출신 외국인 노동자 5명이 자국 여성을 납치해 금품을 뜯어내는 사건이 발한 것을 비롯해 해외 범죄조직의 활동 정황은 꾸준히 수집되고 있다.

이들은 베트남 하노이 지역 출신 조직폭력배로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달 말에는 자국민을 상대로 거액의 도박판을 벌이고 환치기를 해오던 베트남인 불법 체류자들이 무더기로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6월에는 태국 방콕 출신 폭력배들이 자국인들이 운영하는 유흥업소 등에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다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동안 우발적인 단독범행이 주를 이루던 외국인 범죄가 최근 몇 년 사이 계획적인 단체범행으로 발전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해외 범죄조직의 국내 유입은 10여 년 전부터 이뤄졌으나 다행히도 정교한 조직범죄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 조직들은 국내 조폭과 같은 행동강령과 서열 등 기본적인 체계는 미쳐 갖추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앞으로 몇년 안에 이들이 조직폭력배화 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경찰은 단순히 외국인 밀집지역으로 관리해왔던 외국인 거주지역이나 활동지역을 밀집지역과 산개지역, 일반지역으로 세분화해 외국인 범죄나 범죄자를 집중관리하기로 했다.

또, 정기적으로 외국인범죄 집중단속을 벌여 외국인 범죄자들이 조직화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는 계획이다.

경찰청 외사국은 지난 6월 1일에서 7월 20일까지 '외국인 범죄조직 척결 관련 기획수사'를 벌인 결과 외국인 범죄자 2,650명을 적발하고 이 가운데 157명을 구속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레종 에트랑제’라고 불리며 1831년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 1세가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5개 대대 규모의 용병(傭兵)을 창설한 것이 효시다. 이후 외인부대는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전 세계 분쟁지역에 동원됐으며, 최근의 걸프전을 비롯, 전 세계에서 3만50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용기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버리겠다’는 부대 정신을 구축했다. 때문에 모험심에 불타는 전 세계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최강의 특수부대’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세계 138개국 출신 8500여명으로 구성돼 있는 외인부대에는 한국인도 수십여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IMF경제난 때에는 외인부대에 지원하려는 한국인들이 급증하기도 했다. 외인부대는 국적에 상관없이 만 17∼40세의 남자를 대상으로 신체검사 등 일련의 테스트를 거쳐 선발한다. 어학능력, 개인 신상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발 및 훈련과정이 혹독해 지원자의 90%가 탈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대하면 프랑스국적과 함께 프랑스 내 각종 공공요금의 70% 할인혜택이 주어진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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