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판결에 성폭행범 날뛰는 나라 될 판

지난해 12월 23일, 남들은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들떠 있을 때 한 소녀는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다. 판사의 입을 통해 나온 “무죄”라는 단어가 소녀의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판사가 판결문을 통해 “피해자가 항거불능의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볼 수 없다”며 가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판사는 성폭행이 아닌 성관계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피해자를 울렸다. 검사는 다시 항소할것이라며 피해자를 독려했으나 이 어린 13살 소녀에게는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는 말이 사실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최근 성폭행범 관련 사건의 판결이 성폭행 피해자를 두 번 울게 만들고 있다.

성폭행 범죄가 형법상 친고죄인 것을 감안할 때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해 재판을 진행하려면 굉장한 의지가 필요하다. 재판을 진행하면서 가해자와의 만남 가능성도 커지고 본인의 신상 정보도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윤상 소장은 “성폭행 피해자가 재판에 임하기 전에 ‘어쩌면 본인이 살았던 터전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재판을 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는 등의 다짐과 의지를 확인 받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성폭행 피해자는 이런 위험을 모두 감수하고 재판에 나선다. 그러나 최근 법원의 성폭행 사건 솜방망이 식 처벌이 피해자들의 의지를 꺾게 만들고 있다.


성폭행범, 무죄·감형으로 풀려나기 일쑤

수원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유상재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23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특수준강간)로 기소된 양모(21)씨 등 대학생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09년 12월 28일 당시 동네 선후배 사이인 양씨 등은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김모(당시 12세)양을 군포시 당동의 한 여관으로 유인해 술에 취하도록 한 뒤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어린 소녀이고 음주를 한 사정은 인정되나 심리적 또는 물리적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항거불능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해자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이들 남성을 따라 모텔에 가 자발적으로 술을 마셨으며 성폭행을 당한 후에 친구들과 같이 피고인을 찾으러 다닌 것을 보았을 때 특수준강간 혐의가 인정된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판결 내용이 알려지면서 인터넷상에선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리꾼들은 “미성년자를 여관에서 술 먹이고 성폭행했는데 무죄라고? 진심입니까?”, “목숨 걸고 저항하지 않으면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성의 의사에 반한 모든 성행위는 강간이고 폭력이다”, “자신의 딸이라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세요”라며 판결을 질책했다. 반면 “특수준강간으로 기소했으니 무죄가 난거다”, “미성년자의제강간으로 기소했다면 유죄일 것을…. 검사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검사를 질책한 의견도 있었다.

지난번 본지 <867호>에서 다룬 지적장애여중생 사건 역시 이와 비슷하다. 지적장애인 여성을 집단으로 성폭행하고도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며 당시 재판부는 고등학생 16명을 전원 불구속 수사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친딸을 상습 성폭행해 아이까지 낳게 한 아버지를 항소심에서 감형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23일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김인욱)는 성폭력범죄처벌법(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노모(42)씨의 양형 부당 주장을 받아들여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7년을 선고해 충격을 줬다.

재판부는 “노씨가 초범이고, 잘못을 반성하고 있으며, 이혼 후 자녀 양육에 최선을 다해온 점, 사건 수사 이전까지 딸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점, 피해자인 친딸이 아버지의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원심의 형은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누리꾼들은 “감형 사유와 양형기준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에 대해 서울 한 지법의 부장판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판결문을 보면 딸이 도망갔다가도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가 남동생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까 우려해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 성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만큼 피고인의 죄질이 좋지 않은데 이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밝혔다.


동성애자는 정황만으로도 성폭행범이라 몰아

이처럼 여성성폭행 피해자 사건엔 관대한 재판부가 동성애 성폭행 사건엔 지나치게 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2009년 6월 18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이모(24) 수경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이씨는 서울경찰청 제4기동대 소속이었던 2008년 6월 ‘촛불집회’를 계기로 전투경찰 제도에 회의를 느껴 육군 복무 전환을 신청했다가 해당 부대로부터 근무태만 등의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그러던 중 검찰은 같은 해 12월 이씨를 또다른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전경으로 복무하던 지난해 8월 19일 용산경찰서 내 숙소에서 잠을 자다 후임병 2명의 가슴과 배를 쓰다듬는 등 지금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동료를 강제 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씨는 “당시는 당직근무를 서던 때라 범행이 불가능했다. 또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선임병도 있는데 후임 처지에서 고참 대원을 강제 추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상황상 가능했다고 보이고, 여러 대원이 법정 진술하였기 때문에 강제추행죄 유죄를 적용한다”고 밝혔다. 이어 “고소인들이 사건 10개월이 지나서 한꺼번에 고소장을 제출했고, 피고인에 대한 여러 불이익이 이루어지던 시점에 제기된 것을 참작하여 집행유예를 결정한다”고 판시했다.

앞선 2008년 1월 3일 이 수경은 “1년을 이성애자로 살아왔고, 남은 1년을 동성애자로 복무하고 싶다”며 현역 전경으로서 동성애자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이후 부대 내에서 이 수경에 대한 대원들의 구타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센터는 “성폭력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전에 없이 급진적이고, 추행이 가능한 상황이었는지에 대해 매우 상세한 반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능했을 법한’쪽으로 과감히 해석했다”며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판결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커밍아웃한 이후, 전경제도를 문제삼은 것에 대한 군대에 보복성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9년 9월에 발표된 ‘OECD 국가 성범죄 발생률’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성범죄 발생률 2위를 차지했다. 또 지난해 10월 12일 서울지방경찰청 국정감사에 따르면 성폭행 범죄 건수는 2009년 도쿄가 213건인데 반해, 서울은 2394건으로 무려 10배에 달했다. 서울의 성폭력 발생건수는 미국 주요 도시보다도 많아 2008년 기준으로 할 때 서울은 2218건, 뉴욕은 1964건, 워싱턴은 1727건으로 서울이 1위를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성폭력상담센터 2009년 상담동향을 살펴보면 1481건의 상담건수 중 성폭력 상담건수가 1338건으로 90% 넘게 차지하고 있다.


도쿄 213건, 서울 2394건 무려 10배나 많아

이처럼 우리나라 성폭행 사건은 증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법리 해석 문제는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김영란(54) 전 대법관은 지난해 12월 4일 서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젠더법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해 “성범죄 사건에서는 정황증거를 가지고 강간이 아니라는 판결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모텔에 순순히 따라왔으면 강간이 아니라는 식의, 마치 프랑스 등 서구에는 누드비치가 있는데, 여자가 그 곳에 갔으면 성폭행을 당해도 된다는 식의 법리 해석을 극복할 방안을 찾아야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판사마다 같은 사항을 두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고무줄 판결을 줄이기 위해서는 성폭행범에 대한 양형기준 정착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2009년 8살짜리 초등생을 만신창이로 만든 조두순 사건 때도 관대한 판결로 물의를 빚자 엄격한 양형기준을 제시하기로 한 바 있다. 이에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시민단체들은 “올해 4월까지 확정키로 한 성폭력 관련 형법개정 최종안에서는 성범죄를 무겁게 처벌하는 기준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며 “성폭행 관련 피해자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8월, 양형기준을 어긴 1심 법원의 판결을 파기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 정당하다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여성 3명을 성폭행 또는 성폭행하려한 혐의로 기소된 A(51)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1심 판결을 깨고 징역 3년을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지난해 12월 7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이 ‘1심의 양형이 부당하다’고 판단한 이유로 열거한 사유들은 형법상 양형의 조건으로 열거된 사유”라며 “이를 참작한 원심의 양형 판단에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지영 기자] sky1377@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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