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어등산 ‘묻지마 칼부림’ 살인사건 전말

“나를 정신병원 보내려 한다”며 60대 남성 살해
등산객 몰리는 휴일 대낮의 참극…주민 불안↑

[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어등산에서 한 등산객이 흉기에 찔려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휴일 대낮에 등산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흉기를 휘두른 범인은 범행 후 도주하다가 산 정상에서 체포됐고 등산객과 주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경찰 조사 결과 범인은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지난 16일 오전 광주 광산구 우산동. 신경외과에서 진료를 받은 김모(49·남)씨는 입원을 권유하는 가족들에게 벗어나기 위해 자택에서 뛰쳐나왔다. 김 씨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비닐하우스를 발견하고 들어가 길이 30㎝가량의 흉기를 주웠다. 그는 다시 동네를 배회하다가 비가 내리자 인근의 한 대학에 들어갔다. 김 씨는 이 곳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예비군복을 입고 하루를 보냈다.

이튿날인 17일 오전 8시. 김 씨는 평소에 몇 번 올라간 적이 있는 어등산으로 향했다. 전날 주운 예비군복을 입고, 흉기를 흰 속옷으로 왼손과 팔목 쪽에 감은 채였다. 김 씨는 이후 산 속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같은 날 오후 5시경. 휴일을 맞아 집 근처인 어등산을 오른 주민 이모(63)씨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을 내려가다가, 팔각정 쉼터 옆에서 잠시 전화통화를 했다. 이 때 이 주변을 배회하던 김 씨가 이 씨 앞을 막아섰다. 김 씨는 자신이 소지한 흉기로 이 씨를 위협하며 “나를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느냐”면서 휴대전화를 뺏으려 했다. 놀란 이 씨가 넘어지자 김 씨는 그의 목과 가슴, 허벅지 등을 소지하던 흉기로 9차례 찔렀다.

당시 팔각정에는 3명이 쉬고 있었는데, 김 씨가 접근하자 2명은 달아나고 이 씨 혼자 미처 달아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는 범행 직후 이 씨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통화목록을 확인하려 했지만 잠금 설정 때문에 보지 못하고 휴대폰을 발로 밟아 망가뜨렸다.

이후 김 씨는 산 정상인 동자봉 방향으로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마주친 한 등산객에게 “사람 하나를 죽였다”고 소리치며 또다시 흉기로 위협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 남성은 흉기를 피해 달아났고 김 씨는 계속해서 산 위로 올라갔다.

한편 쓰러져 있던 이 씨를 발견한 등산객 2명이 오후 5시17분 경찰에 “예비군복 차림의 남성이 갑자기 이 씨를 흉기로 찔렀다”고 신고했다.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도착했을 때 이 씨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경찰은 산 정상으로 김 씨를 쫓아갔다. 정상에는 김 씨가 예비군복 차림으로 한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다. 김 씨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찰에게도 흉기를 휘두르며 위협했다. 경찰은 테이저건(전기충격기)을 쏴 김 씨를 제압하고, 살인혐의로 긴급체포했다.

왜 찔렀나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경찰이 지난 19일 현장검증을 벌인 결과 당시 김 씨는 심각한 과대망상 증세를 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현장검증 과정에서 “가족이 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려했다”면서 “살인은 생명의 위험을 느껴 나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하며 죄책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김 씨를 범행 직후 검거하지 못했다면 추가 범행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는 범행 후 도주하는 과정에서 다른 등산객에게 또다시 살해 위협을 한 이유에 대해 “등산객 전체를 믿을 수 없었다. 날 죽일 것 같았다”고 밝혔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일부 등산객들은 “등산도 마음대로 못 한다”며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광주에 거주하는 한 시민은 “주말이면 수백, 수천 명이 왔다가는 산에서, 그것도 벌건 대낮에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면서 “앞으로는 등산도 마음 놓고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등산 동호회의 한 회원 역시 “CCTV가 없는 곳이 없을 만큼 세상이 좋아졌는데도 이런 일이 발생한 건 충격적이다. 산에 오를 때 호신용 무기도 챙겨야 되겠다”고 했다.

시민들의 신고 의식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김 씨는 아침 8시경 어등산에 올라 사건이 발생한 시각까지 약 10시간이 넘게 돌아다녔다. 예비군복을 입은 데다 흉기까지 소지한 상태였다. 이날 피해자 이 씨가 희생되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신고하지 않은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예사롭지 않은 행동과 옷차림에도 신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세태 때문에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신고를 하지 않는 점이 아쉽다”고 밝혔다.

경찰은 김 씨가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등산객을 보고 흉기를 든 자신을 신고해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보내려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보고, 전문기관에 김 씨에 대한 정신감정을 의뢰할 방침이다.

shh@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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