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외국에서 태어났지만 언제나 한국을 그리워했다. 외국 생활에 따른 소외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머니 김윤실의 영향이 더 컸다.
“할아버지는 독립군이었어. 만주 벌판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지. 만석꾼 땅을 다 팔아 후손에게 아무 것도 물려주지 못하셨지만, 더 큰것을 물려주셨지. 바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야.”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을 자랑스럽게 말해 주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수원에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 주려는 듯했다.
“아버지도 조국을 위해 일하셨어. 정부 비밀 요원으로 목숨을 걸고 활약하다 돌아가셨지. 아버지 죽음에 의혹이 많지만 그게 비밀 요원의 운명 아니겠어?”
틈만 나면 해 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일제시대에 귀족이었다면 친일파 아녜요?”

참고 있던 수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친일파면 어때? 할아버지는 일본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진보주의자였어.”
수원의 부정적 반응에 성민이 반박 주장을 폈다.

“게다가 지금은 글로벌 시대야. 어느 나라든 선택해서 살면 되는 세상이야.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고. 친일을 하든 친미를 하든 각자 소신대로 살면 돼.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내 나라고,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이 내 민족인 거야.”

신대륙을 차지해 급성장한 다민족 국가 미국의 시민권자다운 논리였다.
수원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쌓아 온 친밀한 감정이 눈 녹듯 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일로 두 연인이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 진짜 사건은 다음 날 일어났다.
웨스팅하우스 부속 도서관. 서가 코너의 후미진 곳에서 두 남녀가 은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둘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자세히 보니 스킨십을 나누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복도를 지나치던 수원은 이상한 예감에 도서관 창문으로 다가섰다.

‘아니!’
놀랍게도 남자는 배성민이었다. 한국에 들어가야 한다더니 그곳에 있었다.
상대 여자는 어제 세미나에 참석했던 연구원이었다. 아토믹캐나다 회사에서 왔다고 했다. 어제는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를 나누었던 두 사람이 지금은 진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었다.

수원은 피가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원은 현기증을 느껴 가까스로 벽에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은 서로 허리를 껴안은 채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건물 로비에 이르자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은 뒤 역시 서로 모르는 사람들처럼 각기 다른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원은 정신이 아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동안 성민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걸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배신감과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수원은 그날 성민에게 이별을 통고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성민은 ‘한국에 한 달 머무르는 동안 매우 바쁠 것’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메일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던 수원은 보낸 메일을 취소했다. 그리고 이메일 아이디를 바꾸었다. 전화번호와 핸드폰 번호도 바꾸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성민이 수원과 연락하기 위해 애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수원은 모른 척했다. 오해를 풀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러나 수원은 연락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빌라 엠 로쏘를 입안에 머금고 맛을 음미하던 성민이 수원을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우리가 헤어진 지 2년도 넘었지요?”
수원은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떼었다.
“내 전공은 핵융합, 네 전공은 핵분열. 말하자면 나는 융합하려는 사람이고 너는 분열하자는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 우리 사이를 끝낸 것도 너잖아.”
“그럴듯하네요.”

수원은 2년 전 웨스팅하우스 도서관에서 목격했던 일을 꺼낼까 하다가 말을 삼켰다.
“코펙 소속으로 있다고요? 무슨 일 해요?”
수원은 착잡한 심정을 애써 바꾸며 물었다.
“가르쳐 줄 수 없는데? 내 방에 잠깐 들른다면 몰라도⋯”
성민이 은근한 눈길로 제안했다. 수원은 눈을 흘기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성민이 와인 잔을 내려놓고 수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할아버지 땅 되찾는 것, 성공할 것 같아.”
성민이 눈빛을 빛냈다.

“그거 찾으면 연구하느라 골몰하며 살지 않아도 돼. 태평양 한가운데 섬이나 하나 사서 우리만의 왕국을 세워 볼까?”
순간 사그라 들던 이질감이 되살아났다.
‘여전하구나.’
이제 와서 도서관 여자는 별일 아닐 수 있었다. 문제는 서로 너무도 다른 가치관이었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수원은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4. 뜻밖의 커플
 
두 사람은 무역센터 지하상가로 나왔다. 꽤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환한 불빛 아래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쌍쌍이었다.
“이대로 헤어지자고?”
배성민이 아쉬운 눈으로 물었다.
“차라도 한 잔 더 할까?”

성민은 수원의 손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맞은편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커플이 걸어오고 있었다. 고집스럽고 촌스러워 보이는 남자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활기차 보이는 여자. 반라의 헐렁한 상의에 광택이 도는 스키니 바지를 입고 굽 높은 부츠를 신은 여자의 모델 같은 분위기 때문에 남자가 더 초라해 보였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조합이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수원도 무심결에 그들을 쳐다봤다.
“어머, 한수원 아냐?”
그때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발걸음을 멈췄다. “유미? 고유미?”
여자가 반갑게 뛰어와 수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유미, 정말 고유미였다.
<계속>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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