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기타큐슈·이토시마]

[편집=김정아 기자/사진=트래블에브리띵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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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프리랜서 김관수  기자] 알 수 없는 시기다. 과거 어느 시절이 이토록 흐릿했을까. 집을 나와 후쿠오카로 가는 길, 바깥세상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모두, 의지와 상관없이 차단당한 것만 같았다. 맘 편히 숨을 쉴 수도, 만질 수도, 입과 코로 음미할 수도 없는 참담함을 예상하며 그렇게 후쿠오카에 닿았다. 또 다른 단절의 늪을 체감하기가 무섭게 공항을 빠져나와 짓누르던 공포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 보려 애썼다. 그리고 출장을 핑계 삼아, 혹독한 겨울에서 탈출한 한 마리 곰처럼 어슬렁어슬렁 먹이를 찾아 다녔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곧 ‘봄’이 찾아오고야 말 것이라는 아주 명료하지만 간절한 단 한 가지 사실을. 후쿠오카와 기타큐슈 그리고 이토시마는 그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토시마

후쿠오카를 잠시 비켜나온 이토시마를 찾은 날, 한때 간장공장으로 이용되던 옛 목조가옥에서 점심식사로 오후가 시작됐다. 구름 낀 날씨가 무색한 연둣빛 꽃바구니와 뒤뜰의 정원, 알록달록한 계절채소 샐러드, 간장으로 조린 도미회, 지하 저장고에서 빛을 밝히는 와인, 나무 테이블 위의 케이크 한 조각과 더불어 외진 민가에서의 타임라인을 감미롭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긋하게 비추는 창가의 햇살에 자리를 차지하고 이층 카페에 마냥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은 객의 배부른 욕심일 뿐이지만, 가까운 곳에서 숨겨진 비경을 감상하는 일만큼은 욕심이 아니었다.

[사진=트래블에브리띵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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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실타래를 풀어놓기라도 한 듯, 흰 실 뭉치가 쏟아져 내리는 시라이토 폭포가 만드는 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오로지 폭포를 위한 최소한의 것들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고요함과 아늑함에 아직 늦지 않은 식후경을 평화로운 안식의 시간으로 누릴 수 있었다. 폭포 아래에 펼쳐진 작은 소도시를 지나 먼 바다 위를 지키는 몇몇 섬에서도 시라이토 폭포가 만드는 오늘의 평화를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결국 폭포수는 흘러내려 도시를 지나 바다에 닿을 테니, 바닷가 마을 사람들도 지금쯤 겨울이 녹아내렸음을 전해 들었겠지.”

소도시의 안정감은 신사 안에서 최고조에 이르러 ‘힐링’이라는 두 글자를 살포시 건넸다. 유독 밝은 빛을 내뿜는 나뭇잎의 무리가 하늘을 가려 신사 안에 바깥세상과는 다른 유토피아적인 봄을 만들어 놓았다. 분위기 넘치는 분위기. 발걸음은 꿈결 속에서 구름 위를 걷고 있다. 위엄을 내려놓고 사랑을 선택한 걸까. 지역 수호신을 모시고 있는 사쿠라이 신사는 보다 큰 사랑을 앞바다에 심어 놓았다. 금줄로 인연을 지키며 거친 바다에서의 외로움을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는 부부바위. 아. 위로가 아닌 불멸을 이루어나가는 신계의 사랑이겠지. 하얀 도리이 사이를 걸어 부부의 인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지극한 사랑의 기운은 인근 해변 곳곳에도 뿌려져 연인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오로지 하늘과 바다만을 바라보는 키 큰 야자수 나무, 그 나무의 지고지순함을 동경하는 연인들이 속삭이는 선셋 카페, 그리고 바다를 향해 몸을 숙인 야자수 나무 사이에 매달린 그네 하나. 인스타그램에서 다시 만나게 될 사진 속 수많은 연인들의 행복을 기대해 봤다.

[사진=트래블에브리띵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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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큐슈

가라토 시장

슬슬 소풍이 생각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도시락 싸들고 가는 둘만의 오붓한 소풍이 아니더라도,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 앞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이 몹시 그립다.

후쿠오카현을 빠져나와 야마구치현의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1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짧은 드라이브 코스로 다녀와도 좋은 시모노세키에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할 예정이었다. 목적지는 바닷가 앞 수산시장인 가라토 시장. ‘횟집에라도 가는 걸까?’ 흔히 그래왔듯 회센터를 생각했지만 가라토 시장은 보다 ‘인스타그래머블’하고 소풍의 ‘갬성’을 꼭꼭 채워 놓은 시장 아닌, 여행지였다. 나이불문, 성별불문. 먼저 시장 밖 해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뭐지? 뭐야?’를 남발했고, 시장 안에서는 궁극의 집중력으로 발품을 팔며 수없이 많은 초밥과 튀김, 그리고 각종 해산물 틈에서 ‘양손 가득’ 쇼핑을 실천했다. 일본에서 복어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니 복어를 재료로 한 된장국과 튀김, 그리고 각종 초밥을 손에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관람차와 등대, 수려한 간몬교와 야자수 그리고 바다 위를 오가는 어선들을 TV가 아닌, 눈앞에서 두 눈으로,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자리. 과식은 필수가 됐다.

간몬교 아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해저터널이 있다. 약 1140m 길이의 일본 최초의 해저터널을 두둑해진 배를 꺼트리기 위해 걸었다. 1944년 개통되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듯, 터널을 걷는 내내 바다 밑을 걷고 있다는 사실도 쉽게 믿겨지지 않았던 시간. 일상과 환상이 왕복 2차선 보행로를 교차하는 동안, 이미 야마구치현에서 후쿠오카현의 모지에 와 있었다.

[사진=트래블에브리띵스 제공]
[사진=트래블에브리띵스 제공]

 

모지코 레트로

해가 하늘 위에 쨍하고 나타났다. 기타큐슈 모지의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주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의 옷차림은 더더욱 얇아졌다. 어촌마을의 레트로 감성은 그렇게 화창한 날씨의 오후를 만나 더욱 실감나게 드러나고 있었다. 과거 사람들이 떠나가며 인구가 적은 ‘마을’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한때 잘나가던 국제 무역항은 활기찬 도심을 떠올릴 정도로 제법 규모가 느껴졌다. 이렇듯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은 서양식 빌딩들이 레트로의 최전선에 서서 나들이 나온 시민들의 감성을 슬며시 꺼내어 주고 있었다. 무역회사의 사옥, 아인슈타인이 머물던 영빈관, 옛 선착장 등이 담고 있는 불변의 사실들은 이제 무엇보다 소중한 그들의 자산이 됐다. 공간의 이동보다는 시간의 이동을 제공하여 방문객들의 소중한 주말 오후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바나나맨은 모지코 레트로에서 가장 바빠 보였다. ‘과거 대만을 통해 바나나를 수입하던 곳이기에 지금 이곳에서 바나나맨이 최고의 셀럽이 될 수 있었다’라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줄을 선다. 바나나맨과 함께했다는 인증샷을 남길 수 있는 줄 안에는 국경도 없다.

레트로는 기차역에도 있고, 골목에도 있고, 음식점 메뉴에도 있고, 이곳을 지키는 이들의 옷차림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고, 향기로운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듯 우리에게 지금 너무나 필요한 그것들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누군가와 함께, 마음 놓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지구의 평상심이 말없이 유지될 때, 우리는 늘 봄 안에서 살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봄날, 모지코 레트로에 만연했던 그 보통의 풍경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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