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사건 진실 이제는 밝혀야 할 때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

정부는 지난 12일 8·15 특별사면 대상자를 발표했다. 사면된 이들 중엔 정치인들 12명이 포함됐다. 이 가운데 형 집행면제 특별사면을 받은 권영해(71) 전 안기부장(현 국정원)이 가장 눈에 띈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안기부장이었던 권 전 부장은 지난 97년 대선 국면에서 북풍사건을 일으켜 98년 4월 구속기소됐다. 이어 징역 7년10월을 선고받았고 복역 중이던 2000년 1월 건강이 악화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하지만 2006년 6월 재수감됐고, 올 6월 다시 풀려나 병원에 입원했다. 현재는 자택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북풍사건으로 권영해 전 안기부장과 함께 처벌받은 안기부직원 11명도 사면대상에 포함됐다. 하지만 이들은 이번 사면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지난 10여년 간 온갖 불명예를 다 뒤집어쓰고 살아왔을 뿐 아니라 이번 사면은 ‘무죄’의 뜻이 아니라 ‘용서’의 뜻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풍사건에 연루돼 철퇴를 맞은 안기부 직원들은 “북풍사건의 진실은 따로 있고 빠른 시일 내 그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말하는 ‘북풍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북풍사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일 당시 98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정원이 공작을 꾸민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국정원의 대북첩보라인이 초토화됐고 이 작업에 참여했던 국정원 직원들이 모두 옷을 벗었다.


북풍의 진실 주인공 권영해 입 닫아

북풍사건에 대한 시각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북풍사건이 정치공작의 일환이었다는 시각이다. 이는 검찰 수사결과 발표에서 드러난다.

검찰의 ‘북풍사건 수사결과' 자료(98. 5)를 살펴보면 97년 대선 전 북풍사건에 대해 “북풍사건의 본질은 지난 대선기간 중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과 이를 역이용한 안기부의 정치공작이 결합된 사건으로 밝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시각은 북풍사건 당시 공개됐던 내용이 진실임에도 정치공작이라는 공세에 밀려 거짓말로 매도됐다는 것이다.

권 전 부장은 북풍 사건이 불거질 당시 “재미교포 윤홍준씨의 기자회견은 사실이며, 이는 정치공작이 절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씨는 대선 직전인 97년 12월 11일 중국 베이징에서 `김대중 후보가 북한의 김정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어 일대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북풍사건에 연루됐던 안기부 직원 김영철(가명)씨는 “윤씨의 기자회견내용은 모두 진실이었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여론은 회견 내용의 진실여부를 가리기에 앞서 엉뚱하게도 안기부의 정치공작이냐 아니냐를 따지는데 집중했다. 기막힌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다면 북풍사건은 어떻게 발생하게 된 것일까. 역대 선거에서 북한은 항상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색깔과 당시 시국이 후보의 당락을 결정하는 핵심요소가 됐다. 이 때문에 특정 정치인이 북한과 커넥션이 있어 북풍을 주문했을 것이란 의혹은 매 선거 때마다 제기됐다.

97년 대선 때 북풍사건이 안기부의 대선개입인가 하는 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직 명확하게 판가름 나지 않았다고 보는 쪽이 옳다. 북풍사건의 핵심인물인 권 전 부장이 입을 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권 전 부장은 북풍사건이 특정 대선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한 정치공작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윤씨의 기자회견을 직접 기획했는지 여부와 추진 의도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제 3자를 통해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해 회견을 열었을 뿐”이라고만 밝혔다.

하지만 안기부의 선거개입 행태는 정권교체 뒤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과 검찰이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면서 상당 부분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북풍사건은 안기부의 대표적인 정치개입사건으로 완전히 굳혀졌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북풍사건의 전모를 살펴보면 이렇다.

대선 직전인 97년 12월 2일 안기부는 같은 해 8월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김대중 후보에게 보낸 편지를 국민회의에 전달하고 사흘 뒤인 5일 이 편지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해 이를 언론이 보도했다.

다음날 고성진 대공수사실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편지 내용을 공개하면서 “오씨 월북사건과 관련해 김대중 후보에 대해서도 의혹과 심증을 갖고 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북풍 사전 조율한 남한 고위층은?

윤씨의 기자회견은 다음날인 11일에 열렸다. 12일에는 오씨가 <평양방송>에 나와 “고마운 김대중”이라고 말했다. 안기부는 이 방송 비디오 테이프를 방송사에 배급했다. 13일 재미동포 김영훈 목사와 임춘원 전 의원 등이 일본 도쿄에서 “김병식 북한 사민당 중앙위원장이 김대중 후보한테 보내는 편지를 받았다”며 공개하고, 오씨가 2차 방송 연설을 했다.

대선 이틀 전인 16일에는 윤씨가 서울에서 3차 기자회견을 연 뒤 곧바로 출국했다. 검찰은 이런 일련의 ‘북풍’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오익제·김병식 편지 사건 등은 남북관계 주도권 장악을 위해 상대하기 쉬운 후보의 당선을 유도한다는 ‘김대중 불가론’에 입각한 북한의 공작에 권 전 부장 등 안기부 수뇌부가 ‘편승’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또 안기부가 가지고 있던 정보에 거짓 사실을 짜깁기해 윤씨에게 20만달러 등을 주기로 하고 기자회견을 사주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김병식씨의 편지를 안기부 공작원인 ‘흑금성’이 베이징에서 받아 온 사실이 드러나는 등 안기부와 북한의 커넥션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또 국내의 한 인사가 12월 1일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과 전화통화한 내용을 안기부에 보고한 문건에는 박씨가 △김대중 후보가 71년 도쿄에서 김병식한테 20만 달러를 받았으며 △오익제가 월북하기 전 김대중 후보와 모든 것을 토의했고 △오씨를 통해 향후 북한과 교류를 기도했던 내용들을 일본 방송 등에 폭로할 계획이라며 “김대중의 대북 관련 사항을 이회창 진영 및 관계 당국에 제공해 활용하는 것은 한국 정서상 불가능하므로 외국 언론 플레이를 하기로 했으니 한국 정부에 이를 미리 알려 대처하도록 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보고서에는 또 ‘박씨가 북한 통전부 부부장 전금철과 긴밀히 협력 중’이라고 나와 있다. 이에 박씨가 북한 고위층과 협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한 내 특정 세력과도 긴밀히 조율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런 의혹과 관련해 검찰은 수사발표 때 “오익제씨 기획입북설의 진위와 안기부나 정치권이 북한을 사주해 일련의 편지들을 보내게 했는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하겠다”고 밝혔으나 이후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김영철씨는 “윤씨가 기자회견 때 발표한 내용은 대부분 확실한 증거가 마련된 것들이다”며 “북풍을 안기부의 정치개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북한이 김대중의 당선을 막기 위해 남측을 상대로 역 공작을 폈고 안기부는 이를 이용해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는 등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북한은 이미 DJ의 당선을 점치고 있었고 또 이를 위해 물밑 지원을 벌이고 있었다”며 “윤씨는 북한을 드나들며 북측 고위인사의 수첩을 입수해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을 찍어 왔다. 그 사진은 아직도 국정원의 캐비닛에 보관돼 있다.

이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북풍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 바 ‘북풍일지’ 들춰보니…

‘음지서 일하는’ 국정원 직원 일방적 매도 논란도

△97. 8. 15 오익제씨 월북 발표
△10. 27 남파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체포
△10. 31 강연정 음독자살
△11. 1 고영복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체포
△11월 초 국민회의, 안기부에 `고영복 리스트 악용 경고
△11. 20 고성진 안기부 대공수사실장 부부간첩 사건 전모 발표
△11. 22 김병식 북한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이 보낸 `괴편지 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집으로 배달
△11. 24 국민회의, 김병식 편지를 `공작으로 규정하고 안기부에 신고
△11월 말 국민회의, 오익제 편지 왔다는 첩보 입수
△12. 2 안기부, 국민회의에 오익제 편지 전달
△12. 5 안기부, 서울 목동 국제우체국의 오익제 편지 압수수색 실시.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긴급회견 통해 `조작극으로 규정
△12. 6 고성진 실장, 서울지검 기자실서 오익제 편지 전문 공개
△12. 7 안기부, 오익제 편지 관련 기본대응계획 문건 작성
△12. 11 윤홍준, 중국 베이징에서 `김대중 후보가 북한의 김정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자회견
△12. 12 오익제, ‘평양방송’ 연설
△12. 13 재미교포 김영훈 목사, 임춘원 전 의원 등 일본 도쿄 데이고쿠 호텔에서 김병식이 김대중 후보에 보내는 편지 받았다며 공개. 오익제, ‘평양방송’ 2차 연설. 국민회의, 정재문 한나라당 의원과 안병수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베이징 접촉 폭로
△12. 14 국민회의, 북한군 2~3개 소대 휴전선 투입 첩보 입수
△12. 15 조세형 대행, 대북한 특별경고 성명 발표
△12.16 국민회의, 정재문-안병수의 팩스서신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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