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부터 각국 대표는 자국의 원자력발전 기술 홍보에 열을 냈다. 미국이 먼저 나섰다.
“우리 미국은 원자력 104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요.”

“스리마일 원자로 사고의 폐해가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프랑스 대표가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이미 30년 전 일입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은 안전도를 우선으로 하는 기술을 개발해 그 어느 나라보다 안정성에 있어서는 최고를 자랑합니다.”

“우리 일본은 그동안 미국과 협력체제로 원자력 발전을 운영해 왔는데 얼마 전부터 독자적인 활로를 개척해 왔습니다. 튼튼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제 일본이 국제 원자력 시장을 주도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 대표가 나섰다.

“원자력에 관해서라면 우리 러시아가 첨단이지요. 러시아 역시 체르노빌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 안전성과 효율성에 집중하여 신 기술을 연구, 개발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연구비용만으로 270억 달러를 배정해 놓고 있지요.”
러시아 대표의 말이 끝나자 강병욱 처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 30년 동안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강병욱 처장이 유창한 영어로 연설을 해 나갔다. 영국 유학파답게 고급 영국 영어를 썼다.
“원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력입니다. 한국의 우수한 두뇌들이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전력을 쏟고 있습니다. 마침내 친환경적인 한국형 원전 개발에 성공해 완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강병욱 처장은 옆에 앉은 한수원을 돌아본 다음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독특한 제어봉 부식 방지 시스템에 관해서 아실 것입니다. 이제 한국은 원전 기술 개발의 선두에 나서고 있습니다. 천연 자원은 적지만 인적 자원은 풍부한 대한민국이기에 가능한 얘기입니다.”
“최근 녹색 에너지 정책을 내세워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야심을 보이는 나라가 있다던데요?”

강병욱 처장이 말을 마치자 미국 대표가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제치면서 말했다. 어느 나라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을 가리키는 말임을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
“외국 기술을 도용해서 세계 원자로 시장을 교란시키는 국가나 기업을 제재할 방법도 찾아야 합니다.”

프랑스 대표도 성토에 나섰다. 역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을 염두에 둔 발언임에 틀림없었다.
이어서 영국과 일본도 은근히 한국에 대해 반감을 표현했다. 한국이 원자로 발전 시장에서 강대국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으로 인식되는가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강병욱 단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강대국의 공격성 질문에 대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서도 미소를 띠고 여유 있게 대처해 국제 신사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수원은 원자력 수출을 둘러싼 무역 전쟁의 치열한 이면을 실감했다.
회의는 오후 네 시 경에 끝났다.
“나는 피곤해서 호텔에 들어가 쉴 테니 시내 관광할 사람들은 천천히 돌아보고 오세요.”

강병욱 단장이 두 손으로 눈두덩을 비비며 말했다.
“우리는 악성(樂聖)들이나 만나러 갈까?”
성민이 수원에게 다가와서 제의했다.
“악성이라고요?”

수원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자 성민이 설명했다.
“동쪽 시가지 가장자리 파크링가에 가면 베토벤, 슈트라우스, 슈베르트의 기념상이 줄지어 있어.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브람스 기념상도 있지.”
“그보다는 그냥 거리 구경이나 해요.”
수원은 두 팔을 깍지 껴서 위로 뻗어 올렸다.
“왜, 피곤해?”

“성민 씨는 괜찮아요? 난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온몸이 뻣뻣이 굳은 느낌이에요.”
“그래? 난 흥미롭기만 하던걸. 국제 고수들의 진검 승부.”
두 사람은 시청 공원에서 관광 마차를 타고 도나우 강변을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장 쉔부른 궁 앞에 다다랐다. 엄청나게 넓은 잔디밭과 고풍의 건물들이 잘 어울렸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빽빽하게 들어찬 마로니에가 정겨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 좋다!”
수원이 풀밭에 큰 대 자로 누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민도 옆에 따라 누웠다. 사파이어 색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뭐가?”
“이 평화로움.”
“하하하. 회의가 그렇게 힘들었어?”

성민이 몸을 조금 일으켜 수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성민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별장을 세계 곳곳에 두고 계절별로 옮겨 가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승마와 사냥을 즐기며. 물론 수원이 너와 함께.”

성민이 벌렁 누우며 말했다. 귀족의 삶을 꿈꾸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쉔부른 궁을 나와 택시로 도나우 타워의 전망대에 올라 시내 전경을 즐겼다. 멀리 도나우 강 운하가 실처럼 흘러갔다. 타워 앞에 있는 호수 너머에는 빨간 지붕 일색인 주택들이 장난감처럼 줄지어 있었다. 푸른 숲과 잔디가 빨간 지붕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마치 동화의 나라 같았다.
두 사람이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붐비는 정거장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앗! 저 사람.”
수원이 길 건너편 모퉁이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그래?”
“아까 회의장에서 무비 카메라로 우리를 찍었던 사람이에요.”
수원이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러나 거기 있던 남자는 어느 결에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잘 못 보았나?”
수원은 조금 전까지 남자가 서 있던 길모퉁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두 사람이 호텔에 돌아오자 강병욱 단장이 프론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 둘이서 망명이라도 한 줄 알았어. 여긴 북한 대사관이 있어서 그쪽 사람들 잘못 만나면 골치 아파. 자, 저녁 식사하러 가지.”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밖에 나갔다 올게요.”
성민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니, 그 동안에 저녁 함께할 사람까지 사귀었어?”
강병욱 단장이 웃으며 물었다. 수원은 성민의 말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따가 봐.”
성민은 미안한 표정으로 수원을 향해 찡긋 윙크를 한 뒤 총총 걸음으로 나갔다.

대표단과 저녁식사를 마친 뒤 수원은 17층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텔레비전을 켰다. 북극 얼음이 녹아 세기의 재난이 지구에 찾아온다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었다. 딱딱한 독일어라서 그런지 더욱 긴박감이 느껴졌다.
수원은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피가로 하우스에서 공연 중인 오페라를 중계하고 있었다.

수원은 텔레비전을 끄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울의 밤거리처럼 불빛이 휘황하지는 않았다. 건물에는 간간히 불이 켜져 있고 가로등이 길게 줄을 서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원은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섰다. 낮부터 미행자가 있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미니 전기 충격기를 핸드백에 챙겨 넣었다.
수원은 로비에서 호텔 심야 카페 운영 안내문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호텔 지하는 건물 밖의 밤거리와 달리 화려했다. 카페와 맥주 홀 등 번쩍이는 간판이 줄지어 있었다.

간판 구경을 하며 지나가는데, 프로이센이라는 간판이 붙은 카페 창가 좌석에 성민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둘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수원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어? 수원아!”
수원이 다가가자 성민이 깜짝 놀랐다.
“밖에서 약속이 있다더니?”

“저녁 먹고 자리를 옮겼어. 이 친구들이 호텔까지 데려다 줬지. 자, 인사 나누지.”
성민이 일행에게 수원을 소개한 뒤 한 사람씩 인사를 시켰다.
“아토믹캐나다 컴파니의 미스 소피아 빌리에.”
수원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붉은 머리털과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낯이 익었지만 누군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오셨어요?”

수원이 묻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프랑스에서 건너가셨나요?”
“할아버지 대에 이민 갔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빌리에가 프랑스 성이잖아요.”
“오우!”

수원이 대답하자 소피아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이쪽은 프랑스히시떼 원전 회사의 제럴 빅토르 박사.”
성민이 곱슬머리에 배가 불룩한 남자를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히시떼가 무슨 뜻인가요?”

수원이 악수를 나누면서 프랑스 말로 물었다. 빅토르가 땀에 젖은 손으로 수원의 손을 꽉 쥐었다. 아파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수원을 쳐다보는 빅토르의 눈에서 이상하게 섬뜩함이 느껴졌다.
“히시떼는 전기라는 불어의 엘렉뜨히시떼, 즉 영어로 엘렉트릭이란 말의 끝 부분입니다. 국가명과 전기라는 단어의 합성어죠.”  
“회사 이름이 인상적이군요.”

“저는 잭 스미스라고 합니다. 미국 웨스턴감마 엘렉트릭에 근무합니다.”
스미스는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기왕 왔으니 맥주나 한잔 해.”
성민이 종업원에게 컵을 하나 더 부탁했다. 성민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었으나 수원은 마음이 불편했다. 뭔가 긴한 얘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등장으로 대화가 끊긴 것 같기 때문이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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