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내가 우려한 것처럼 극점을 향해 가지 않고 거의 160도 정도 돌아 소련 영토를 향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날개 오른편 창으로 이상한 비행체가 나타났다. 얼른 보아도 소련 전투기 수호이 15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상황을 빨리 파악했다.
‘우리는 소련 영공에 들어섰다. 비상 출동한 소련 전투기는 영공 침범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만약 민간 비행기를 귀순시키거나 착륙을 유도하려 했다면 여객기의 왼쪽에 전투기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게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의 규정이다. 그런데 오른쪽에 전투기가 나타났다는 것은 적으로 간주해 격추시킬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수호이 전투기가 두 대 보였다. 여객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고도를 다시 잡는 것인지, 아니면 기장이 당황한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후 10초도 지나지 않아 쾅하는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요동쳤다. 왼쪽 날개가 너덜거리는 것이 보였다. 동체에 큰 구멍이 나고 기내 기압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기내 물건이 구멍 쪽으로 휩쓸려갔다. 전투기 조종사 아나톨리 케레포프가 쏜 미사일 두 방 중 한 방이 날개에 명중했던 것이다.(이 사실은 나중에 확인했다.)

“으악!”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왼쪽 날개 쪽에 있던 승객 10여 명이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전투기에서 발사된 것은 R-60 열 추적 미사일이었다. 만약 동체에 맞았다면 비행기는 박살나서 추락했을 것이다. 코앞에 있는 비행기를 빗맞힌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는 안전벨트가 무색할 정도로 요동치면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9천 미터 상공에서 강하하기 시작한 비행기는 얼마 가지 않아 흰색밖에 보이지 않는 호수 얼음 위에 가까스로 내려앉았다. 한쪽 날개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사히 착륙한 것은 신기에 가까운 조종사의 솜씨 덕분이었다. (기장 김창기 씨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 70대 중반일 것이다.)

나는 일단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부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승무원들이 부상자를 바닥에 눕히는 등 구조에 안간힘을 썼다. 산소 호흡기는 찢어져서 산소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혼란 상태로 한 시간 이상이 흘렀으나 아무도 기내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흰 색깔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있자 소련 병사를 실은 탱크와 트럭 수십 대가 몰려와서 비행기를 에워쌌다.

승무원들이 열어놓은 트랩으로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장교가 한국어 통역을 데리고 앞에 나섰다.
“나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 공군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대령이다. 이 비행기는 소련 연방 공화국 영공을 침범하고 소련군의 착륙 유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강제 착륙시킨 것이다. 앞으로 기장 및 승무원과 승객 여러분은 ICAO 규정과 소련 국법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 군의 명령에 따라주기 바란다.”

그때 맨 뒤에 있던 한국 남자가 영어로 항의를 했다.
“이 비행기는 대한민국 여객기다. 민간 항공기인 것을 확인하고도 발포하고 강제 착륙시킨 것은 명백히 ICAO 규정과 국제 법을 어긴 것이다. 빨리 부상자를 치료하고 승객들을 돌려 보내주기 바란다.”
“당신은 어느 나라의 누구냐?”

대령이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그때 곁에 있던 장교가 러시아말로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당신이 뇽구고 한이야?”
“뭐라고?”

한국 남자가 반문했으나 대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빨리 끄집어내라!”
그 남자는 비행기에서 제일 먼저 끌려 나갔다.

그 이후 나흘 동안 우리는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그 기간 에 한 번도 그 남자를 볼 수가 없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를 다 내리게 한 뒤 기내를 샅샅이 수색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모두 분해하여 실어 날랐다. (이 사실도 뒤에 알았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블랙박스인지, 금덩어리인지, 아니면 파리서 한국으로 옮기는 중이었던 중요한 비밀문건인지 알 수 없었다.

소련군은 우리를 시내 군 병영으로 옮겨 수용했다. 우리는 한 사람씩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달리 나를 여러 번 호출해 심문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당신 가방에 들어 있는 게 뭐야?”

이런 질문이었다.
나는 비행기 여행 시 짐 찾는 게 귀찮아 기내 가방만 간단히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른 가방이었다. 짐표에 ‘스즈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 보는 가방이었다.
“모릅니다.”

여러 번 같은 대답을 반복하였으나 그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제야 전후 사정을 추측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도용해 어떤 물건을 옮기려 한 것이었다. 누가 그랬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소련군이 대한항공 여객기를 미국의 RC-135 스파이기로 오인했다는 말도 그때 들었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 변명이었다. 비행기가 보잉 747이라는 것은 육안으로도 확실히 분간할 수 있었다. 스파이기 운운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만약 스파이기로 오인해 격추시킬 생각이었다면 지상 포대에서 미사일을 쏘아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지상 포대는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는 나흘 뒤에 미국의 팬암 747로 헬싱키를 거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 동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승무원들도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나는 서울에서 일본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날 이후 집 밖에만 나가면 누군가가 나를 감시했다.
뇽구고 한!
일본 발음으로 적어서 그렇지 용국 한, 아버지 한용국임에 틀림없었다.
소련군이 아버지 이름을 먼저 댄 것을 보면 아버지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비행기를 강제 착륙시켰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기에?’
수원은 아버지가 틀림없어 보이는 한국 남자와 관계된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소련군이 스즈끼 가방에 집중해 조사한 것을 보면 그 가방이 타깃이었을 수도 있었다.
‘스즈끼 이름으로 실은 그 검은 가방에 들어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국가적 비밀 문서? 핵과 관련된 물건? 대한민국 핵무기 보유 프로젝트 관련 문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스즈끼가 그 물건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게 틀림없었다. 스즈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국제 음모에 휘말려 희생당한 것이었다.

“당신이 뇽구고 한이야?”
“당신이 뇽구고 한이야?”
수원은 소련군 대령 드미트리예프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수원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조국을 위해 일하다가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 아버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가 마침내 딸 앞에 자취를 드러낸 것이었다.
“아버지.”
수원은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아버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14. 사랑은 날개를 타고

수원은 신 고리 발전소 1, 2호기 건설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리 1, 2호기의 제어시스템 리모델링이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굳이 수원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고리 발전본부 제2발전소 소속이었던 수원은 서울 본사 정책처로 발령난 후 다시  신 고리 건설 본부 파견 형식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주영준 차장이 서류 박스며 컴퓨터를 옮기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사양했지만 영준은 아무 대답도 않고 묵묵히 짐을 옮겨 주었다.
“제가 빈에 갔다 온 사이에 별 일 없었나요?”

수원이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다.
“고유미 씨와 정세찬 박사가 다녀갔습니다. 우리 회사 르포 기사를 쓴다고 다른 기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곳저곳 취재하고 갔어요.”
“유미는 지난 주 서울에서도 만났어요. 부산으로 출장 온다고 하면서 우리 회사에도 다녀갔군요. 다른 일은 없었나요?”

“외부 세력의 은밀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안 전산망을 공격해서 망가트리려는 해킹 시도도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방어를 했지만.”
“보안 시스템을 노린 것인가요?”
“그런 셈입니다. 하마터면 뚫릴 뻔했습니다.”

신 고리 1, 2호기는 건설 공사는 거의 마무리돼 가고 있었다. 돔 형식의 봉긋한 원자로 지붕이 웅장하면서도 우아하게 보였다. 내부 시설도 상한 진척을 보여 원자로에 불을 붙일 날이 멀지 않았다. 한국형 친환경 원자로의 탄생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신고리 1, 2호기는 APR-1400이라고 불렀다. 이 원전이 완성되면 지금 한창 진행 중인 APR+를 곧 완성, 수출의 주목표로 삼을 계획이었다. 원래 2015년에 완성할 계획이었으나 세계 원자로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는 바람에 본래 계획보다 3년 당겨서 NUTEC-2012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한국형 원전의 새로운 부지로는 울진 덕진면이 선정됐다. 2012년이 되면 백 퍼센트 한국 기술에 의한 원전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중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인 냉각수 가압장치를 오로지 한국인의 기술력으로 완성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재 수원이 관여하고 있는 계측제어 기술인 MMIS도 90퍼센트 가량 완성되었다. 세계 원자력 발전 시장에 한국형 원자로가 선두로 나설 날이 멀지 않았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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