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김형! 집에서 전화 오거든 광주에 갔다고 좀 얘기해 줘.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밤샘하러 갔다고 말이야. 아마 내일 저녁쯤 올라올 거라고.”

“뭐야? 그건 지난달에 써먹었잖아. 거짓말도 창의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김병식이 천기팔의 어깨를 쥐어박으며 쏘아주었다. 천기팔의 원래 이름은 천기표지만 모두가 끝 자를 바꾸어 기팔이라 불렀다. 본명을 부르면 오히려 모를 지경이었다.

“지난달에는 어머님이 아니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그 집은 한 달 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러니? 그래서 제수씨가 속아 넘어갈 것 같아?” 김병식이 계속 빈정거렸다. “잘들 헌다, 여편네 속여 먹으려고 친구 부모님을 이승 저승 왔다갔다하시게 만드니? 정신들 좀 차려. 내일 아침 생방송 준비는 완벽한 거지?”

어느새 들어왔는지 아침 와이드 생방송 프로 ‘좋은 아침, 좋은 출발’의 책임 PD인 조민팔(실은 조민규) 부주간이 호통을 쳤다. “글쎄 기팔이가 항상 문젭니다. 우리 팀에서 좀 뺄 수 없을까요? 일 때문에 직장에서 야근하는 것도 용납 받지 못하는 남편을 꼭 같이 끼구 일해야 합니까?”

김병식이 항의 겸 불평을 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천기팔을 빼고 싶지 않았다. 책임감이 강하고 아이디어가 기발해서 급할 때는 기팔이, 기팔이 하고 목메게 찾았다.

궂은일엔 항상 앞장서서 해 치우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천기팔이었다. 그러나 그가 늦깎이 장가를 든 뒤부터 사람이 싹 달라졌다. 다른 동료들이 밤새워 일하며 이튿날 새벽부터 시작될 생방송 준비를 하는데 그는 저녁 7시만 넘으면 슬그머니 빠져버렸다.

다른 동료들은 야속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평생 노총각으로 늙을 줄 알았던 천기팔이 마음에 꼭 드는 배점순을 만난 뒤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그는 석 달 만에 배점순으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나 결혼해 주는 대신 그녀는 까다롭고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여러 개 내세웠다. 맏이인 기필의 처지는 아랑곳 없이 2년 동안 부모 모시지 않고 딴살림 살아야 한다는 것부터 시작해 1주일에 세 번 이상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 서약을 요구했다.
그중에 아주 웃기는 항목 두 개가 있었다.

첫째 그녀가 준 두 돈쭝짜리 금반지를 항상 끼고 다닐 것. 고양이 얼굴이 새겨진 유치하고 희한한 반지를 자기 보듯이 보기 위해 목욕할 때도 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외박은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 한 달 1회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야근을 밥 먹듯 하는데도 그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천기팔은 그 조건을 모두 승낙하고 서약서에 손도장을 꾹꾹 찍어주었으니 그 뒷일을 어떡하랴!

아침 방송을 위해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동료들을 젖혀두고 집으로 도망치듯 가는 것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만은 기팔이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책의 해’를 중간 결산인가 뭔가 한다면서 벌여 놓은 일이 갈피를 못 잡게 되었다. 밤새 자료 편집을 해야 함은 물론이고 내일 새벽 생방에 출연할 저명한 작가 몇 사람은 천기팔이 없으면 카메라 앞에 세울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정을 점심 먹고 난 뒤 알게 된 천기팔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통사정했다.

“나하고 제일 친한 녀석이야. 근데 아버님, 아니 어머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그 녀석 3대 외동아들이라 친척도 없단 말이야. 내가 꼭 광주까지 가야 하니까 한 번만 봐 조! 그 대신 다음 달은 하룻밤도 안 나갈 테니까.”

그는 손이 발리 되도록 사정을 해서 간신히 반승낙을 얻어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며 편집을 마쳤다. 그가 비록 한 파트이긴 했지만 독립된 프로를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아침을 장식할 꿈을 꾸고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자 그는 스튜디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숨을 죽였다.

생방송은 실수 없이 그런대로 잘 나가는 것 같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작가들이 자기 책을 들고 나와 MC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책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천기팔은 작가들에게 책을 카메라에 부각시키게 들어 올리라는 수신호를 계속 보냈지만 출연하고 있는 작가들은 아무도 기팔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보다 못한 천기팔이 카메라 렌즈를 피해 엉금엉금 기어가서 손으로 책을 받쳐 들어주었다. 손은 약간 보였지만 얼굴은 잡히지 않았다.

생방송을 무사히 끝낸 그는 조부주간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천기팔은 기분이 잔뜩 부푼 채로 하루를 신나게 보냈다. 간밤에 단 1초도 눈을 붙이지 않았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일을 마치고 저녁때 집에 들어가면서 그는 연막을 쳤다. 아...! 그 녀석, 어머니 영정 앞에서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그가 흘금흘금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아내는 아주 묘한 미소를 흘리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 첫 작품은 어땠어요?”

“응…. 저. 그거, 조 부주간이 썩 잘됐다고 칭찬하더래. 난 없었지만.”
다시 아내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창 그러고 있던 아내가 부엌에서 봉투 하나를 가지고 왔다. 결혼 서약서였다.
“이거 읽어보시고 찢어 버리세요. 지키지도 못할 맹세 같은 거야 없는 게 낫지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는 짐작했다. 거짓말이 들통난 것일까?
“당신 친구 어머님 돌아가셨단 거짓말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직장이냐 아내냐 택일하라고 윽박질렀지만, 남자야 둘 다 있어야 하는 것 아녜요? 서약서 제2조는 무효예요.”

뜻밖의 대사면령(?)을 들으며 천기팔이 물었다.
“당신 나 광주 안 간 것 어떻게 알았지?”
“오늘 아침 TV ‘책의 해’ 생방송에 당신 손가락의 고양이가 출연했던데. 호호호...”

“뭐야?” 천기팔이 손가락을 펴 반지의 고양이 얼굴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