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찬은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박정희는 곧바로 미국에 있는 한국계 핵물리학자 2백여 명을 국내로 불러들이는 등 미사일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1980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핵무기를 선보였을 겁니다. 이런 계획이 담긴 문서가 최근에 발견되었거든요.”

“정말이에요?”
수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1979년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암살한 것도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미국이 사주한 일이란 말이 떠돌 정도입니다.”
“어머!”

유미가 놀랐다.
“1971년에 핵무기 제조 계획을 세웠고 1975년에 설계를 완성했다는군요. 그러나 미국의 반대가 엄청났지요. 농산물 차관 중단 압력까지 넣었어요. 밥상을 뒤엎겠다는 이야기였지요.”

“정치라는 게 참 무서워요. 요즘도...”
유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세찬이 말을 계속했다.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배제한 핵 개발을 검토하면서 가장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나라가...”
“소련.”
유미가 나섰다.

“땡. 프랑스였어. 프랑스와 플루토늄 재처리 계약까지 비밀리에 했지만 프랑스도 얼마 가지 않아 계약을 파기한다고 일방적 통고를 해왔어. 그러나 파기는 표면상이고 실제는 비밀리에 협력이 계속되었다는 설도 있었지.”
“그 이야기는 저도 인터넷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수원이 기억을 되살리며 이야기했다.

“맞습니다. 대한항공 902편 사건도 그것과 관계가 있다는 설이 있어요.”
대한항공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수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잠시 후 수원이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강국들이 걱정하는 것은 한국의 핵무기가 아니라 한국이 만드는 핵발전소예요. 핵무기는 군사적 파워지만 핵발전소는 경제적 파워거든요. 한국은 두산, 현대, 대우, SK 같은 재벌들이 모여 기술 융합으로 세계 대기업들을 위협하고 있지요.”

정세찬은 사다 놓은 맥주가 다 떨어진 뒤에야 일어섰다. 정세찬을 보내고 난 수원과 유미는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정세찬 씨 어때? 잘해 주지?”
수원이 은근하게 물었다.

“착하긴 한데 좀 무능한 편이야. 성민 씨처럼 적극적인 남자가 못 돼.”
“적극적인 남자?”
수원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세상에 대한 욕심도 그렇고, 여자를 대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 여자한테도 적극적이야?”

수원이 쳐다보자 유미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다음 날 수원은 르네상스 호텔 앞에서 성민을 만났다. 성민은 은색 밴을 몰고 나타났다.
“차 새로 샀어요?”

“놀러 좀 다니려고 렌트한 거야. 안이 넓어서 좋아. 잘 수도 있어.”
성민은 수원을 옆자리에 앉히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저, 혹시...”
“뭐?”
수원은 고유미가 차고 있는 팔찌에 대해 물어 보려다가 말았다. 티파니 디자인을 모방한 제품을 누군가 선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화성. 거기 가서 자가용 비행기를 빌려 타려고. 둘이서 타고 한번 날아보자고.”
“우리나라에 그런 곳도 있다니 믿어지지 않네요.”
“한국도 레저 활동이 제법 다양해졌더군.”
“그래요?”
“개인 비행기 연습장, 교습소 같은 것이 스물아홉 군데가 있어. 동호회도 서른 개가 넘어.”
“파일럿 면허증 있어요?”

“물론이지. 캐나다에서 라이센스를 땄어. 미국보다 캐나다가 쉽게 딸 수 있거든.”
밴은 앉는 자리가 높아 전망이 시원했다. 성민은 제한 속도를 훨씬 넘겨 가며 달렸다.
“화성 말고 더 가까운 비행장은 없어요?”

“있지. 용인과 안산에도 있어. 하지만 화성 어도 비행장만큼 좋지는 않아. 어도 비행장은 시화호수와 붙어 있어서 경치가 아주 그만이야.”
두 사람은 시화호 근방의 즐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세시쯤 어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탁 트인 지평선 끝에 바다가 보였다.

성민은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항공사 교관이 끌고 온 비행기 앞으로 갔다. 빨간색으로 몸단장을 한 작은 비행기에 프로펠러가 한 개만 달려 있었다.
수원은 성민이 시키는 대로 비행기 좌석에 올라갔다. 난생처음 비행기 조종석 옆자리에 앉아보는 것이었다.
“정말 조종할 수 있어요?”
수원은 미덥지 않아 자꾸 물어 보았다.
“자, 출발합니다.”

성민은 대답하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하자 태풍이 불 때처럼 거센 바람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움직이던 비행기는 얼마 가지 않아 땅에서 발을 떼고 공중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높이 오를수록 공포와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와!”

비행기는 하늘 높이 올라 고도를 잡자 편안하게 날기 시작했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시화호와 대부도 주변의 집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얘는 이름이 뭐예요?”
“얘? 비행기? 이런 비행기를 ULP라고 하는데, 울트라 라이트 플랜의 약자지. 그건 기종 명칭이고 보통 편하게 스카이 스타라고 해.”
“2인승밖에 없어요?”

“아니지. 이건 2인승 경비행기인데 4인승, 10인승도 있어.”
“무게가 얼마나 돼요?”
“비행기 자체는 225킬로그램이라고 하는데 240킬로그램까지 사람이나 짐을 실을 수 있어.”

비행기는 완만하게 원을 그리며 날았다.
“저기 녹색 섬 보이지. 그게 닭섬이라는 곳이야. 오른쪽으로 길게 시화 방조제가 보이지?”
수원은 슬쩍 성민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깔끔하게 수염을 깎은 턱이 오늘따라 더 산뜻해 보였다.
“지금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 거예요?”
“아직 천국까지는 못 갔어. 계기에 510피트로 나와 있는데.”
비행기는 다시 바다 위로 나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하늘에서 청혼이라도 한다면 멋있지 않을까? 그야말로 사랑의 날개 위에서 청혼하는 거지. 하하하.”
성민은 소리 내 웃으면서 수원의 눈치를 살폈다.
“이 비행기로 고리까지 갈 수 있어요?”

듣고 있던 수원이 딴청을 피웠다. 수원은 성민에게 도통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수원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성민은 무언가 비밀을 갖고 있었다. 미국 웨스팅 하우스 도서관에서 성민과 스킨십을 나누던 소피아 빌리에, 빈 회의에까지 나타난 그 여자. 유미의 팔에 감긴 뱀 모양의 팔찌. 게다가 수원을 납치하려다 불발에 그친 제랄 빅토르도 성민이 소개해 준 사람 아닌가.
“고리? 기름이 모자라 갈 수가 없어. 그뿐 아니라 항공청에 미리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놔야 하거든. 꼭 가야 한다면 내가 자동차로 모셔다 드리지.”
“됐네요.”

수원은 씁쓸히 웃어 보였다.
20여 분간 하늘을 난 수원과 성민은 사뿐하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성민의 조종술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수원은 성민에게 품고 있는 의혹을 털어놓아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의 오피스텔에 누군가 침입하려고 했던 것, 차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된 것에 대해서도 의논하고 싶었으나 끝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 땅 찾는 일 잘 되어가요?”

성민은 수원을 힐끗 돌아본 뒤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글쎄. 성사될 듯 말 듯하네. 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고.”
성민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수원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15. 인터넷 IP를 쫓아라

본부 홍보실에 자료를 찾으러 갔던 수원은 복도에서 영준과 마주쳤다.
“안토니오 수사는 더 진전이 없나요?”
“수사본부가 서울로 옮겨진 뒤로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나톨리의 정체는 파악했나요?”

“중국 핸드폰을 추적해 보았는데 전혀 상관없는 중국 호텔 직원이 주인이었답니다. 그 호텔 직원 말로는 한국에서 온 여자 관광객이 있었는데 한국에 한 번 초청하겠다고 해서 공민증 번호와 주소를 준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좀 수상하다는  것밖에는 모른답니다.”

“그러면 그 여자가 대포 폰을 만들어 아나톨리에게 준 것일 수도 있군요. 장 안토니오, 이경만 등 안토니오 낚시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오고간 전화 통화, 계좌를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뭔가 더 나오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회사 정원으로 걸어 나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걸 기대해 봐야죠. 오늘밤 부산 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있는데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영준이 몇 번 주저하다가 먼 산을 보면서 제안했다.
“둘이서요?”
“아닙니다. 김승식 부장이랑 조민석 과장도 같이 갑니다.”
“끝나면 한잔하시겠네요. 저는 다음에 둘이 갈 때 가지요.”
수원이 농담처럼 말을 던지자 영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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