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로마의 겨울은 대단히 따뜻했다. 아내와 나는 북 유럽을 여행 하다가 로마에 갔었는데, 날씨가 너무나 청명하고 따뜻해 마치 우리나라의 늦가을을 맞는 듯한 날씨였다.

우리 부부가 함께 로마에 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콜로세움 근처에 있는 사보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여기에 온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하듯 렌트카를 타고 시내 관광에 나섰다.

우리가 시내로 나가기 전에 호텔의 지배인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었다.
“요즘 로마는 어수선합니다. 특히 정치테러가 심해 잘못 휩쓸리면 큰 봉변을 당하지요. 해가 떨어지기 전에 호텔로 돌아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콧수염을 기르고 사람이 좋아 보이는 그는 친절하게 영어로 말해 주었다. 그의 말대로 로마의 조간신문은 온통 테러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의 고적들을 보러 다니는 사이 지배인의 주의는 까맣게 잊었다.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과 그래고리 펙이 다니던 곳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을 많이 했으니까 손을 넣지 마세요.”

‘진실의 입’ 앞에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거짓말한 사람이 거기에 손을 넣으면 무사하지 못하다는 전설이 있는 신의 입이었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기에?”
“당신은 하루에도 수 십번씩 날 사랑한다고 했지만 실은 그게 거짓말이잖아요?”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정말 그 많은 말 중에는 거짓말도 한두 번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손을 넣어 보았다. 그러나 진실의 입은 나를 용서해 주었다.
우리는 스페인 광장으로 바티칸 성당으로, 그리고 천사의 성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중에도 특히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영혼과 육신을 가두었다는 카타콤베에서는 숙연해진 마음으로 옷깃을 여몄다. 쿼바디스 교회를 비디오 카메라에 담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사파이어 모습이 서울을 실어온 듯했다.

짧은 겨울 해가 거의 뉘엿해진 오후 4시 무렵 우리는 트레비 분수 앞에 왔다. 힘차게 물을 뿜고 있는 넓은 분수 주변에는 백 년, 이백  년된 가게들이 의연히 서 있었다.

찻집이며, 이발소, 보석상들이 모두 고색창연했다. 특히 그곳 보석상을 소재로 한 추리 소설은 유명하다. 보석상에서 보석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수억 원어치의 보석을 창 밖 분수대의 물 속으로 슬쩍 던져버리고 밤에 건져가려다 동전을 줍는 얌체로 오인돼 경찰관에게 잡혀간다는 얘기였다.

아내는 분수에 동전을 던진뒤 나에게 포즈를 취하며 비디오로 찍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비디오를 찍는 동안 아내는 물에 좀더 가까이 서려고 하다가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선그라스를 분수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를 어째! 여보 어떻게 좀 해 봐요.”

아내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쉽사리 물속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자의 체면이 서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아까부터 분수대 계단에 앉아 우리 모습을 보고 있던 험상궂게 생긴 이태리인으로 보이는 사나이가 붉은색 윗옷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더니 성큼성큼 분수로 들어가 아내의 안경을 건져다 주었다. 커다랗고 멋없는 코에 위로 찢어진 눈 등이 도저히 친밀감을 느낄 수 없는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조그만 의협심은 우리 부부를 흐뭇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으나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지배인의 경고를 겨우 생각해 내고 오후 5시경에 호텔로 돌아왔다. 해가 지자마자 거리에는 정말 사람의 그림자가 드물었다.
그날 저녁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텔리비젼 뉴스를 보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여보! 그사람이 텔레비젼에 나왔어요. 그사람!”
정말이었다. 낮에 분수대에서 아내의 안경을 건져 주어 나에게 곤경을 면하게 해준 그 험상궂은 사나이의 사진을 텔레비젼에서 여러 차례 비추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좋지 않은 일로 그의 얼굴이 나오는 것 같아 께름칙했다.

이튿날 오래전부터 볼로냐대학에 교수로 와 있는 내 친구가 호텔로 찾아왔다. 그는 ‘장미의 이름으로’라는 추리소설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 교수의 제자로 기호학의 권위자였다.
우리는 어젯밤 뉴스에 나온 험상궂은 사나이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응, 그거 어제 오후에 국회부의장이 나폴리에서 테러를 당해 피살되었는데 그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사나이야. 반정부 쪽에서 고용한 마피아 조직의 일원이라나...”

“나폴리서 사건이 난 것은 몇 시쯤인데요?”
아내가 물었다.
“오후 4시라던가...”
“그럼 그 사람은 분명히 아니에요. 여보 우리가 증인으로 나가 줍시다.”
아내는 또 골치 아픈 제안을 했다.

“함부로 나서면 상대방에게 보복 당할 우려도 있어요. 그런 일에는 말려 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에요.”
그가 충고를 했다. 그러나 아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아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묘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수를 앞세우고 로마 경시청 강력계로 갔다.
“이걸 좀 보시겠습니까?”

나는 가지고 간 비디오 테이프를 강력계장에게 주면서 말했다. 어제 종일 관광하면서 찍은 것이었다. 형사가 그것을 VTR에 걸었다.
거의 끝부분에 가서 트레비 분수와 아내의 활짝 웃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계단에 앉아 있는 험상궂은 사나이의 얼굴이 분명히 보였다. 화면 밑에는 1991. 12. 5. 16. 08의 숫자가 나와 있었다. 16. 08은오후 4시 8분에 찍었다는 자동 메모리였다.

“겨우 신세 갚았네요.”
인생살이에서 남의 신세지기 싫어하는 아내의 말이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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