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화가로 이름난 심춘 백정휴 씨가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연다고 한다. 심춘의 공식 경력은 서울 Y대학의 건축과를 나온 뒤 파리, 이태리 등에서 20여 년간 회화 공부를 하고 돌아 왔다고만 되어 있다.

심춘이 유럽의 무슨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화풍은 국내에서 극찬과  혹평의 양극을 이루었다. 그 중에도 신예 평론가인 황보 진 씨의 평은 신랄했다. 

도대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내세우는 그의 주장은 어불성설일 뿐 아니라 그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주 소재인 백사(白蛇)를 맹렬히 비난했다.
“백사는 괴상한 취미를 잘 나타낸 정신분열적 소재다. 제 딴에는 김동인의 ‘광화사’(狂畵師)같은 예술적 취향을 말하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그건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장난에 불과하다.”

황보 진의 이러한 평이 월간 ‘회화와 예술’에 실리자 심춘은 길길이 뛰었다.
“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저질 평론가의 무식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다. 그런 자가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고로 평론가란 자들은 예술가가 못 되어서 옆길로 빠진 자들이 하는 짓이다.”

심춘의 이 막말은 미술뿐 아니라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등 모든 평론가들을 열 받게 만들었다.
마침내 황보 진이 심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하고 말았다. 황보 진도 가만있지 않았다.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했을 뿐 아니라 1억 원의 손해배상 민사 소송까지 제기했다. 이 사건으로 심춘은 화단의 주목 더 받게 되었다.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여는 심춘은 오픈하는 날 틀림없이 황보 진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녀석 갤러리에 나타나기만 해 보아. 죽여버리고 말거야! 이번에는 백사가 그 녀석은 물어 죽이고 말걸.”

심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다른 사람들이 다 듣는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거품을 물었다. 그의 눈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정말 심춘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걱정까지 했다.

마침내 개인전 오픈하는 날이 왔다. 심춘은 자기가 경영하는 화랑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대부분이 뱀을 소재로 한 그림 82점이 걸렸다.
2백호는 족히 될 것 같은 대작도 역시 백사가 주인공이었다. 제주도의 유채 밭을 배경으로 한 이 ‘백사도’는 보기에 섬찟한 기분도 들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걸작이었다.

화랑 가운데는 간단한 칵테일 준비까지 했다. 개막 테이프를 끊은 뒤 참석한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서서 음료수며 칵테일 한 잔씩을 들고 담소하는 것은 어느 전시회에서나 있는 일이다.
“자네는 언제까지 뱀하고만 살 것인가?”

개막 테이프를 끊을 때 주빈 역할을 한 심춘의 대학 은사인 송송휘 예술원장이 심춘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백사는 저의 아바타입니다. 나의 소원을 나 대신 풀어주지요. 오늘도 그 임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심춘의 이 의미심장한 말은 속셈을 드러내 보인 말이기도 했다. 심춘은 이날을 기다려왔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해 온 평단의 혹평을 한꺼번에 갚아 줘야 한다고 심춘은 생각 하고 있었다.

‘두고 봐. 이 칵테일파티는 죽음의 파티가 될 것이야.’
심춘이 속으로 다짐한 이 말은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심춘은 황보 진을 죽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술을 좋아하는 황보 진은 틀림없이 양주 칵테일 몇 잔을 마실 것이다. 칵테일 잔에는 얼음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 얼음이 바로 죽음의 사자가 될 것이다.

심춘은 아래층 주방에 칵테일용 얼음을 준비해 두었다. 사각형의 각사탕 같은 투명한 얼음이 얼음 통에 담겨졌다. 그 중 얼음덩이 하나가 다른 것과 달랐다. 얼음 속에 팥알 하나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얼음과 얼른 구별할 수 있었다.
심춘은 그 얼음덩이를 눈여겨보면서 딸 정혜를 불렀다.
“정혜야! 나중 파티 때 내가 얼음 가져오라고 전화 하거든 저 얼음 통을 2층 전시장으로 빨리 가져오는 거다.”

심춘이 정혜를 보고 유치원 학생에게 이르듯 말했다. 여고 삼학년인 정혜는 얌전하고 착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모범 학생이었다. 어머니가 없는 집안 살림을 도맡다시피 했다.
솜씨가 뛰어나 얼음을 소재로 한 음식도 잘 만들었다. 얼음팥죽, 빙수, 과일빙수, 아이스크림, 샤베트 같은 것을 잘 만들었다.

“예. 아버지”
정혜는 얼음 그릇을 눈여겨본 뒤 대답했다.
오픈 세리머니는 예정대로 오후 2시에 진행되었다. 뜻밖에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테이프 커팅이 끝나고 30분쯤 지나서였다.
베레모를 쓰고 염소수염을 기른 미술 평론가 황보 진이 나타났다. 심춘은 그에게 의미 있는 냉소를 보냈다.

일행은 심춘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뱀과 누드가 어우러진 그림은 섹시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섬뜩한 느낌은 한 여름의 더위도 잊을 만 했다.

그림을 돌아보던 일행은 1백호 정도 될 법한 그림 앞에 모두 멈추어 섰다. '미녀와 백사'라는 이름이 붙은 그 그림은 모두를 전율하게 했다. 발가벗고 누워 있는 여인에게 수십 마리의 뱀이 덤벼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특히 흰 뱀 한 마리가 여인의 목을 한 바퀴 감은 채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여자를 노리고 있었다. 노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하하. 흉내를 냈구먼. 이 그림은 말이야 탐정소설가 김내성이 쓴 단편 추리소설에 나오는 ‘백사도’를 흉내 낸 거야. 50년대에 발표한 ‘백사도’는 걸작 소설이지. 그런데 거기 나오는 묘사를 그대로 한 거야. 창작적 가치라고는 내 눈곱만큼도 없어. 하하하”

황보 진은 심춘을 쳐다보며 차가운 비웃음을 던졌다.
“저 백사가 오늘 엉터리 평론가 한 사람을 칵 물어버릴지도 모르지!”
심춘이 지지 않으려고 이글거리는 복수의 눈길을 보냈다.
“그림 속의 뱀이 혹평한 평론가를 물다⋯ 그거 기사 되는데... 후후후”
취재하러 왔던 어느 기자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심춘 화백 그림은 돈방석에 앉는 거지.”
다른 기자가 맞장구를 쳤다.
“심춘 화백님, 황보 평론가와 나란히 포즈 좀 잡아 주실래요. 사진 한 장 찍게.”
두 사람의 원수 같은 관계를 잘 아는 사진 기자들이 심술스러운 제안을 했다.
“못 찍을 것도 없지.”

넉살 좋은 황보 진이 심춘 화백의 어깨를 슬쩍 감싸면서 포즈를 취했다.
“좀 웃으세요. 꼭 무슨 원수지간 같아.”
사진기자가 농담을 걸었다. 
감상은 끝나고 칵테일파티가 무르익었다. 예상대로 황보 진은 양주 칵테일 두 잔을 눈 깜빡할 사이에 비우고 석 잔째를 집어 들었다. 그때 알맞게 얼음이  떨어졌다.
“정혜야 여기 얼음 떨어졌다.”

심춘이 핸드폰으로 정혜한테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은 정혜가 얼음 통을 들어다 아버지에게 주고 갔다.
심춘은 돌아다니며 손님들 잔에 얼음을 집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황보 진에게 주어야 할 팥알이 든 얼음덩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얼음덩이에는 진짜 독사의 독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얼음의 가운데 부분에 독을 넣었기 때문에 그것이 녹으면 독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졌다.

파티는 끝나고 심춘의 살인의 꿈은 사라졌다. 칵테일을 마신 사람은 아무도 죽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손님들이 다 가고 난 뒤 쓸쓸한 기분으로 아래층에 들어선 심춘은 맥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 빙수 한 그릇 드세요”
딸 정혜가 팥과 바나나를 곁들인 빙수를 들고 와 생긋 웃었다.
심춘은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딸의 솜씨는 역시 대단했다. 그는 궁금하던 일을 정혜에게 물어보았다.

“얘야, 근데 아까 파티 장에 가져온 얼음에 손대지 않았니?”
“예, 그거요. 얼음덩이 중 하나가 팥알이 들어 있어서 집어냈어요”
정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얼음덩이 어떻게 했니?"
“예, 방금 아빠가 자신 빙수 만드는 데 넣었어요.”
“뭐! 뭐야!”
심춘은 비명을 지르며 마루 바닥에 쓰러졌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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