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 정당성’ 중요시 분위기 바뀌어야”

화성 연쇄살인범 이춘재 대신 누명을 쓰고 2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 한 윤성여씨는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사진=뉴시스]
화성 연쇄살인범 이춘재 대신 누명을 쓰고 2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 한 윤성여씨는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사진=뉴시스]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수사기관의 ‘주먹구구식’ 강압 수사는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됐다. 1988년 ‘이춘재 8차 사건’의 윤성여 씨, 1990년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최인철‧장동익 씨, 2000년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최모씨 등 이들은 모두 검·경찰의 강압 수사로 사건의 가해자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최근 법원은 재심 판결을 통해 ‘무죄’로 인정했다. 수사기관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했지만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비난이 나온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절차적 정당성보다는 결과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조직 분위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 ‘자백’에 의존했던 수사기관 과학수사 도입 후 가혹행위 줄었다

지난 4일 경찰 강압수사에 살인범으로 몰려 21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낙동강변 살인사건’ 피의자들이 구속된 지 30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날 부산고법 형사1부(재판장 곽병수)는 부산 엄궁동에서 발생한 강도 살인 등 혐의로 21년 동안 옥살이를 한 최인철(60)·장동익(63)씨 재심사건 선고공판에서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하경찰서 수사관들이 피고인들을 연행해 조사한 뒤 귀가시키지 않고 보호실에 유치한 행위는 불법체포와 불법구금에 해당한다. 또 사하경찰서 수사관들이 피고인들의 허위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과 가혹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들의 자백은 임의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고, (고문과 가혹행위 등을 통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서 증거 능력이 없다. 범인을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도 일관성이 없는 등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달 ‘이춘재 연쇄살인 8차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사건 발생 32년 만이다.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는 이 사건 재심 선고 공판에서 “과거 수사기관의 부실 행위로 잘못된 판결이 나왔다”며 윤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윤 씨는 1988년 당시 범인으로 검거된 후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19년6개월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 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경찰 고문에 따른 허위 자백으로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낙동강변 살인사건’ 피해 당사자 최인철, 장동익 씨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진=뉴시스]
경찰 고문에 따른 허위 자백으로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낙동강변 살인사건’ 피해 당사자 최인철, 장동익 씨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진=뉴시스]

“수사기관, 결과중심주의가 문제”

앞선 사건들에서 나타났듯이 검·경찰 등 수사기관의 주먹구구식 강압 수사로 강력 범죄 사건의 가해자로 몰려 수십 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례가 나오고 있다. 최근 법원은 재심 판결을 통해 ‘무죄’로 인정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사건의 과정보다는 결과에 치우쳐 있는 조직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는 게 큰 임무이기 때문에 이를 평가 지표에서 가장 중요하게 본다. 사건을 해결하는 건수가 수치화·계량화돼 있고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에 대해선 온갖 비난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조직적·기관적으로 문제가 된다”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유무형적으로 압박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절차적 정당성과 결과적 정당성 중에서 결과 중심적으로 치우치다 보니 절차적 정당성이 침해되거나 가볍게 여겨지는 경우들도 종종 있어 왔다”며 “조직 내부에서 결과에만 집착하다보니까 과정이나 절차는 경시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또 “지금은 과학수사가 도입되면서 강압 수사가 줄었다. 인권 침해 문제나 적법 절차를 어긴 데 대한 독직과 권리남용에 대한 사회적 지탄 등 수사기관에 대한 감시도 강화됐고 처벌이 강화되다보니 많이 바뀌긴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과거 과학수사가 보편적이지 않았을 때는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거나 목격자가 없을 때 ‘자백’이 가장 명백한 증거가 됐다”며 “자백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증거인만큼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강압 수사가 반드시 수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사과했지만 진정성은 ‘글쎄’

경찰청은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결과 무죄 판결이 난 다음 날 공식 입장문을 내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최 씨와 장 씨에게 사과했다. 경찰은 “재심 청구인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 등 모든 분들께 깊은 위로와 사과 말씀 드린다”며 “당시 적법 절차와 인권 중심 수사 원칙을 준수하지 못한 부분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로 인해 큰 상처를 드린 점을 깊이 반성한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최 씨는 경찰이 발표한 사과문과 관련해 “재심 시작 뒤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경찰이 재심 결과가 나오자 당사자가 아닌 기자들에게 ‘사과문’을 낸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장 씨도 “지난해 1월 재심이 진행될 때 ‘경찰이 손 내밀면 잡을 용의가 있고 용서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그동안 단 한번 연락이 없었다”며 “무죄판결이 나오니 언론을 통해 사과하는 것은 형식에 불과하다.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했다.

경찰이 앞선 재심 사건 피해자에 대한 사과문의 내용과 똑같은 내용을 전한 부분도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경찰은 당시 사과문에서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보호는 준엄한 헌법적 명령으로 경찰관의 당연한 책무다. 경찰은 이 사건을 인권 보호 가치를 재인식하는 반면교사로 삼아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는 없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화성 연쇄살인사건’ 진범으로 몰려 20년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 씨가 무죄 선고를 받았을 때 내놓은 사과문과 똑같다.

최 씨와 장 씨의 변호를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는 “앞서 약촌오거리 사건과도 마찬가지로 강압수사로 허위 자백한 사실이 밝혀진 사건이 수차례 있었지만 매번 경찰은 당사자에게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고 기사를 통해서만 접하게 했다”며 “이런 사과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변호사는 “경찰은 뭐가 잘못됐는지 아직 모르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며 “이번 재심 법정에 나와 고문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경찰 네 명의 위증을 문제 삼아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두 사람의 고문을 지시·가담한 경찰관 다섯 명은 모두 퇴직한 상태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한 수사 전문가는 “최근 재심에서 무죄로 밝혀지는 사건들은 수사기관의 잘못된 판단 때문인데 과거에도 이런 전례가 흔했다. 무고한 시민이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경우 이를 수사한 경찰과 검사에 대해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과와 함께 배상이든 보상이든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손해 본 부분은 반드시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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