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열사
김마리아 열사

[일요서울] 3·1운동 하면 대부분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고 기린다. 김마리아 열사 역시 3·1운동과 뗄 수 없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다. 그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도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몰래 들여와 교육·종교계 지도자들에게 전달해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김마리아 열사는 189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개화사상에 일찍 눈 뜬 선구자였다.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식에 눈을 뜬 고모와 삼촌들도 신민회·임시정부 활동 등을 하며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계몽운동과 구국활동에 힘쓰던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키워갔던 셈이다. 김마리아 열사는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교사가 돼 교육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대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자 독립의 기틀 마련을 위해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이듬해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재일 한인유학생들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2·8 독립선언을 준비하게 된다. 

1919년 2월8일 김마리아 열사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했고, 이후 일본경시청에 연행되어 일주일간 취조를 받았다. 그는 도쿄에서의 독립운동 기세를 국내로 확산시키기 위해 2월17일 현해탄을 건너 조국으로 향했다. 김마리아 열사는 독립선언문을 옷 속에 감춘 채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거족적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러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후속활동 논의를 위해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3·1운동 배후 세력으로 지목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6개월 후 출감한 김마리아 열사는 전국 단위 여성 항일운동 단체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군 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그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여성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신으로 다시 체포돼 이듬해 5월 혹독한 고문으로 병을 얻은 채 출감했다.

김마리아 열사는 일제에 두 차례 투옥돼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리다 1944년 3월13일 숨졌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둔 52세의 나이였다. 그는 생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말하곤 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서울 송파구 정신여중·고교 교정에는 김마리아 열사 흉상과 기념관이 있다. 정신여학교는 김마리아 열사의 독립운동 요람이기도 하다. 정신여학교(현 정신여중·고교) 후배들은 후손이 없는 그를 기리고 널리 알리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 독립운동가들보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여전히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갔다. 정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 열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김마리아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89년 서울 보라매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됐고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어록비가 세워졌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