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4·3 아픔 치유하고 상흔 돌보는 것, 우리의 책임”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김일성 일가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폭동”

제주4.3평화공원에 걸린 태영호 의원 사퇴 촉구 현수막. [박정우 기자]
제주4.3평화공원에 걸린 태영호 의원 사퇴 촉구 현수막. [박정우 기자]

[일요서울 | 박정우 기자] 제주 4·3사건이 발생한 지 75년이 지났다. 오랜 갈등을 겪은 후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희생자 명예회복과 진정성 있는 추모는 올해도 어려워 보인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3월13일 “제주 4·3사건은 북한 김일성 일가의 사주에 의해 일어났다”고 발언했다. 더불어 4·3사건을 왜곡하는 현수막과 이를 비판하는 현수막 등이 대거 설치되며, 제주도는 어느 때보다 혼란 속에 75주년을 맞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 사이 극우세력의 과잉진압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뒤에야 ‘4‧3희생자 추념일’이 제정됐다. 이때부터 사건의 진상 규명과 당시 희생자 및 그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사회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관련 서적과 증언,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이승만 정부와 미(美)군정의 강경 진압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민중항쟁’,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명칭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제주 4·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돼왔다.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사건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이후 1993년 제주도의회에 ‘4·3 특별위원회’가 설치됐고, 2000년 1월 국회에서 여야의원 공동 발의로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며, 사건 희생자·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시작됐다.

제주시에 걸린 제주4.3사건 왜곡방지법 관련 현수막. [박정우 기자]
제주시에 걸린 제주4.3사건 왜곡방지법 관련 현수막. [박정우 기자]

금도 넘은 4·3사건 흔들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이라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전당대회와 더불어 열렸던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사건은 북한 김일성 일가의 사주에 의해 일어났다”며 북한 지령설을 꺼냈고, 최고위원으로 당선됐다.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정치 전략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이와 관련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의 SNS를 통해 “더 이상 이념의 상처를 헤집지 말기를 바란다”며 우려를 표했다.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측은 일요서울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즉각 4·3사건 유족들과 제주도민께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송 의원은 지난 3월9일 4·3 왜곡방지법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제주4·3평화공원(평화공원)에는 제주4·3평화재단의 “4·3 망언 태영호는 즉각 사퇴하라”라는 현수막과 제주4·3희생자유족회의 “4·3 유족 분노한다, 태영호는 사퇴하라”라는 현수막이 입구에 걸려있다.

평화공원 관계자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태영호 의원이 사실과 다른 왜곡 발언을 했다고 판단한다”며 “제주4·3평화재단도 같은 입장으로 (4.3사건 역사 왜곡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 3월30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은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태영호 의원 정계 퇴출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진연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저급한 거짓말과 역사 인식을 보여줬고, 국민의힘은 이 사안에 대해 묵인하며 아무런 발표조차 없다”며 여당의 공식 입장을 요구했다.

제주 현지에서 취재진과 만난 미국인 유학생 카밀라(24, 여) 씨는 “(4‧3 추념일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고 답변했다. 서울에서 4‧3평화공원을 방문한 관광객 김 모 씨(56, 여)는 “4·3사건을 두고 정쟁을 이어가는 게 참 불만스럽다”며 “태영호 의원의 발언은 불쾌하다”고 토로했다. 

다만 태영호 의원실은 앞서 4.3사건 관련 발언에 관해 “여전히 입장에는 변화가 없고, 다지 재고할 계획도 없다”고 일요서울에 답해왔다. 

서북청년단의 재등장, 이들의 의도는?

이어 1946년 결성됐던 극우 반공단체 ‘서북청년단’ 계승을 표방한 ‘서북청년회’가 추념식 당일인 4월3일 제주에서 깃발집회에 나섰다. 

전신인 서북청년단은 4·3사건 당시에도 경찰의 선봉에서 소위 ‘토벌대’로 불리며,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서북청년단을 4·3사건의 발생 원인이자 민간인 대량 학살을 자행한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에 도민사회의 공분이 쏠리며, 도내 사회단체들도 집회장 앞에서 맞불을 놓는 분위기. ‘4·3기념사업위원회’, ‘민주노총 제주본부’ 등은 지난 3월31일 추념식에 앞서 서북청년단 규탄 집회를 열기도 했다. 

제주도민에 피눈물 ‘김일성 현수막’

한편 지난 3월21일에는 제주 전역에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라는 현수막이 일제히 걸려 지역사회가 술렁였다. 

우리공화당 등 극우정당 및 자유논객연합은 현수막을 내걸며 “4·3 진상조사보고서는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며 “미군 자료 등에 공산주의자들이 상부의 지령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에 제주도와 도교육청, 도의회가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현수막을 내릴 것을 촉구했으나, 도선거관리위원회는 ‘통상적인 정당활동’이라는 판단을 내리며 행정대집행은 물거품이 됐었다. 하지만 강병삼 제주시장은 지난 3월30일 “현수막은 정치적 현안에 있는 것이 아닌, 현행 4·3특별법을 위반한 것, 법률 검토를 마쳤다”라며 철거를 위한 강한 의지를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해당 현수막 위에 ‘진실을 왜곡하는 낡은 색깔론, 그 입 다물라’라는 대응 현수막을 걸었다. 현지에서는 도민들에 의해 훼손된 현수막도 여럿 포착됐다. 일부 도민은 현수막을 훼손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도민 고 모(44, 남) 씨는 “조용한 추모가 진행돼야 하는데, 도대체 왜 정치적 이슈로 가져가는지 의문”이라며 “여기서 김일성이 왜 나오는지, 어이가 없다”고 소리를 높였다.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분과 폄훼가 계속되는 제주에서 4·3사건. 희생자 추모를 원하는 유족과 제주도민의 소망이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손상된 서귀포시 '김일성 현수막'. [박정우 기자]
손상된 서귀포시 '김일성 현수막'. [박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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