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妓女)는 전통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 및 풍류로 흥을 돋우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여자를 지칭한다. 기녀는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기녀와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기녀들은 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정한(情恨)이 짙은 고려가요는 대부분 기녀들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기녀는 일패(一牌,관기), 이패(술집 작부), 삼패(창녀)로 나뉜다. 일패 기녀는 시·서와 음률 등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고 함부로 몸을 맡기지 않는 관기(官妓)로, 이들에 의해 우리 전통 가무가 보존, 전승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안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당시 문인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송이(松伊)·소춘풍(笑春風) 등은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진주 기녀 논개(論介)는 대표적 의기(義妓)로 꼽힌다.

우리 역사 인물 가운데 시서와 음률에 뛰어났던 개성 기녀 황진이(黃眞伊, 조선 중종 대/생몰년 미상)만큼 체제를 넘어 남·북한에서 널리 사랑받은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 여러 차례 조명받은 그녀는 기개가 있고 도전과 창조정신으로 충만했던 신여성이었다.

예술과 사랑, 자유를 추구한 이인(異人, 재주가 비범한 사람) 황진이는 조선 중기 재색(才色)을 겸비한 여류시인의 대명사이다. 본명은 황진(黃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출생에 관하여서는 황진사의 서녀(庶女)와 맹인(진현금)의 딸이라는 설이 있는데, 기녀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후자가 유력시되고 있다.

기계(妓界)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15세 경에 자신을 사모하다 병들어 죽은 이웃집 총각의 상여를 움직이게 하려고 속곳을 벗어던져 준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황진이는 16세기 조선 사회의 규범에 따라 당시 기녀들의 소망이었던 사대부의 첩 자리를 마다하고 ‘자유’를 택했다.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양반도 상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진이는 시 한 수로 왕족 벽계수를 유혹했고, 그녀의 격조 높은 ‘유혹 시’ 앞에 벽계수는 군자로서의 허울을 벗어 던졌다. 이 일로 황진이는 일약 유명세를 탔다. 또 황진이는 생불(生佛)로 통하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 색계(色戒)를 범하게 하여 파계시켰다. 도학군자로 명성이 높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 서화담·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진다.

황진이는 한양 제일의 소리꾼인 선전관 이사종과 6년간 전국을 유람하였다. 두 사람은 조선 ‘최초의 계약결혼’ 당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세양과의 애틋한 30일간의 사랑을 끝으로 황진이는 40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황진이의 방향(芳香)은 죽은 뒤에도 조선팔도에 널리 떨쳤다. 그녀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林悌)는 평안감사를 제수받아 임지로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에 시를 바친 것이 말썽이 돼 파직당했다.

이덕형은 <송도기이(松都記異)>에 황진이를 아리따운 ‘선녀’와 천재 시인이자 ‘절창(絶唱)’으로 그렸으며, 유몽인은 <어우야담>에 “뜻이 크고 높았으며 호협(豪俠)한 기개(氣槪)가 있었다”라고 추켜세웠다.

세속의 규범과 관습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方外之遊·방외지유) 구도(求道)의 길을 걸은 황진이를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麗都盲女出天才(여도맹녀출천재) 고려 도읍(개성)의 맹인 어머니는 천재를 낳았는데

片愛緣由解語魁(편애연유해어괴) 한쪽 사랑(상사병) 때문에 기생의 으뜸이 되었네

明月空山心醉切(명월공산심취절) 공산에 떠 있는 밝은 달에 마음을 빼앗겨 취했고

夕陽高閣彈琴哀(석양고각탄금애) 석양 무렵 높은 누각에서 거문고 타는 소리 슬프네

詩歌絶唱奇聞展(시가절창기문전) 시와 노래의 뛰어난 명창은 기이한 소문 전개했고

方外交遊佳話開(방외교유가화개) 세속의 규범을 벗어난 교유로 좋은 이야기 열었네

三絶芳香南北振(삼절방향남북진) 송도삼절 꽃다운 향기는 조선팔도에 떨쳤고

依依姿態向乾杯(의의자태향건배) 아련한 자태 향해 술잔 들어 올리고 싶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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