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특별법 위헌 제청한 성매매여성 직격 인터뷰

[일요서울|최은서 기자]성매매특별법이 위헌 심판대에 올랐다. 지난해 9월 성매매 여성 김정미(42·여·사진)씨가 서울 북부지법에 성매매특별법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한 사실이 알려진 후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에 위헌심판 대상이 된 법률 조항은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 21조 1항이다. 성매매를 한 사람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 벌금·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성매매 여성이 스스로 성매매특별법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착취나 강요가 없는 성인 간 성행위는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요서울]은 김씨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집창촌 ‘청량리 588’인근에서 직접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씨는 지난해 7월 이모(23)씨로부터 13만 원을 받고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수치감에 ‘위헌심판’ 신청

이에 김씨는 “제 3자의 강요에 의한 성매매자는 처벌하지 않고 자발적 성매매자만 처벌하도록 규정한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21조 1항’은 평등권을 침해한 위헌”이라며 “성매매는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의 방편으로 처벌대상이 될 수 없다”고 법원에 성매매특별법 위헌 여부를 심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 9일 서울북부지법 형사4단독 오원찬 판사는 김씨의 신청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성매매특별법 위헌 여부 심판을 제청했다. 오 판사는 “착취나 강요가 없는 성인 간 성매매 행위는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맡겨야하며 성매매는 교화의 대상이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이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함에 따라 김씨에 대한 재판은 헌재 결정 이후로 미뤄졌다.

김씨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성매매특별법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경찰 단속에서 느낀 수치심과 모멸감이었다”며 “살인이나 강도,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단속경찰은 나를 천대했다. 마치 벼랑 끝으로 내몰린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김씨의 기억 속에는 지금도 단속 당하던 날의 풍경이 생생하다. 단속 나온 경찰은 부지불식간에 김씨의 방문을 발로 차고 들이닥쳤다. 놀란 김씨가 몸을 이불로 가리고 옷을 입으려 하자 경찰은 ‘증거가 필요하다’며 미처 가리지 못한 김씨의 몸을 사진기로 찍었다. 김씨는 “도대체 나에게 무슨 짓이냐고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며 “그때 ‘나도 인권이 있는데’란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났고 분노가 치솟았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성매매특별법이 생긴 후 벌금을 맞으면 수백만 원씩 내야하는데 최하 벌금이 100만 원이다”라며 “수백만 원에 달하는 벌금 때문에 단속이 들어오면 증거물을 없애기 위해 콘돔을 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생계형 성매매가 대부분”

김씨는 성매매특별법 시행 두 달 전인 2004년 7월에 청량리로 왔다.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 부모를 모두 잃었다. 월남전 상이용사였던 아버지는 김씨가 20살 때 급성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18살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김씨는 20살부터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에서 일했다. 하지만 25세가 되던 해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와 팔을 크게 다쳤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면서 오래 서 있는 것이 힘들어진 김씨는 미용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직업소개소 등을 통해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경기 광주와 성남 일대의 식당과 카페에서 일하게 됐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하루 일하면 2~3일은 쉬어야 했다. 김씨는 “하루 일당으로 4만 원을 받아 여관비 1만 원·밥값·치료비 등을 내고 나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며 “방을 구하고 싶어도 목돈을 만들 수 있는 길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28살이 되던 해 스스로 성매매 알선 여성을 찾아가 성매매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경기 광주·성남 일대의 성매매 업소에서 6년간 일한 뒤 청량리로 왔다. 그는 “성매매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와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내 몸을 온전히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수치스러웠다”며 “제대로 돈 한 푼 손에 쥐지 못하고 몸이 힘들더라도 식당일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차라리 아빠 엄마 곁으로 가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손목을 긋기도 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이어 “성매수남들도 ‘너가 이러니까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거다’, ‘한 번 성매매에 빠진 이상 이 생활을 결코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등 나에게 비수가 되는 말들을 많이 했다”며 “이런 모멸감을 주는 발언을 들으면 머리끝이 쭈뼛 섰다. 정신적인 상처와 육체적인 고통으로 온 몸으로 울었다”고 털어놨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김씨의 수입은 3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는 김강자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의 ‘제한된 지역에서 성매매를 인정해주는 공창제를 도입해야 한다’, ‘성매매 여성의 경우 생계형과 비생계형으로 분리해 처벌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언급하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의 일을 나쁜 쪽으로만 보는 것 같다”며 “우리는 다만 남자의 성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를 너무 가둬놓는 것은 부작용을 초래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나처럼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힘든 처지여서 성매매를 시작하게 된 여성,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여성 등 생계형 성매매 여성들이 전체 성매매 여성의 70~80%를 차지한다”며 “대부분 이 일로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에 당장 이 일을 그만 두게 하면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씨 역시 이 일을 당장 그만 둘 수는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4~5년 더 이 생활을 유지해 목돈을 만든 다음 미용 자격증을 다시 따서 미용실을 운영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전국 1인 시위 계획을 밝혔다. 김씨는 “1인 시위를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면서 할 계획이다”며 “특히 수일 내로 서울의 청량리역, 영등포역과 포항에서는 꼭 1인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성매매특별법 위헌 제청과 1인 시위로 이 일이 밑바닥 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직업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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