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억원대 유산’의 향방은….최근 날인이 없는 유언장의 효력 여부를 놓고 유가족과 연세대가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유족들은 “날인이 없는 만큼 유언장의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유산을 기부받기로 돼 있는 연세대는 “고인의 뜻에 따라 학교에 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입장이다. 유산을 둘러싼 양측의 공방을 들여다봤다.평생 사회복지활동을 해오다 지난해 11월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김운초 전 한국사회개발연구원 원장. 한국 사회복지계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지난 67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국제사회사업가협회(IFSW) 개인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일생 동안 국내를 비롯 국제적인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다.고인은 또 지난 58년 세계 기독교봉사회 소속 최수열 선교사와 함께 서울 화곡동에 그리스도 신학대를 설립하는가 하면, 모교인 강남대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인재양성에도 힘써왔다.

그런데 최근 그의 유언장을 둘러싸고 유가족과 대학, 그리고 은행간 법적 공방이 벌어지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97년 고인의 자필로 작성한 유언장에는 “본인 유고시 본인 명의의 모든 부동산, 금전신탁 및 예금 전부를 교육기관인 연세대 한국 사회사업 발전기금으로 기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인은 변호사 입회 없이 혼자 작성한 뒤 이 유언장을 서울 양천구 목동의 모 은행 대여금고에 맡겼다. 고인의 유산은 예금과 채권 등 은행 1곳의 한화 78억원과 또다른 은행 1곳의 한화 25억원 등 두곳에 맡긴 103억여원과 미화 166만달러(한화 약 20억원) 등 123억여원. 여기에 경남 통영과 부산 해운대의 부동산 등을 합칠 경우 최고 500여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유산은 유언장대로 처분되면 그만이지만, 유언장에 도장이나 서명이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유언장에는 김씨의 친필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은 적혀 있었으나 도장이나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이를 근거로 고인의 동생 김모씨 등 형제와 조카 7명은 ‘날인이 없는 유언장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은행에 예금지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은행은 고인의 유언장을 근거로 예금 지급을 거부해왔다.

이에 유가족들은 지난해말‘유언장에 고인의 날인이 없는 만큼 효력이 없고 자신들에게 상속 권한이 있다’고 고인의 예금이 입금된 은행 2곳을 상대로 예금반환 청구소송을 냈다.뒤늦게 기부사실을 알게 된 연세대도 “고인이 부동산과 금전신탁 및 예금 전부를 학교에 기부한 만큼 유산의 권한은 연세대에 있다”고 주장하며 ‘독립당사자’참가를 신청했다.독립당사자 참가란 타인간의 소송에 제 3자가 당사자로서 참가하도록 한 민사소송법의 한 제도. 이로써 ‘500억원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은 유가족과 은행, 그리고 유산을 기부 받기로 돼 있는 연세대 등이 참여하며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특히 ‘날인 없는 유언장 효력 여부’는 현재 국내에 적용할 판례가 없는 만큼 지루한 법적 공방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현재 민법에서는 자필증서 유언은 연월일과 주소, 성명을 직접 쓰고 날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판례로도 ‘무인(지장)까지는 유언장으로 인정한다’는 것과 ‘채무변제와 관련된 문서에서는 날인 없이 자필로 이름만 쓴 경우 효력이 있다’는 정도가 있다.이에 대해 유가족 변호사측은 “민법 등에 규정돼 있는 대로 날인이 없는 유언장은 무효이고, 이와 비슷한 판례도 없다”며 “이에 따라 고인의 유산은 유족들이 상속받는게 마땅하다”고 밝혔다.이에 반해 연세대측은 “최근에 날인 없는 자필서명이 서명을 대신할 수 있다는 판례가 있는 만큼 이번 유언장도 효력이 있을 것. 이에 승소할 가능성도 있다”며 “유족들과 법적 공방까지 가고 싶지 않지만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이와 관련, 유족들은 이번 재판에서 패소해도 유족에게 의무적으로 남겨야하는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을 내면 유산의 3분의 1을 상속받을 수 있다.유가족 변호사측 관계자는 “은행을 상대로 한 예금반환청구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높고, 고인의 유산이 유가족에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에 따라 현재로서는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유가족과 은행, 연세대 등이 당사자로 얽히고 설킨‘500억원 유산 소송’에 대해 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주목되고 있다. 한편, 법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고, 유언의 자유도 인정된다. 그러나 상속이 개시되면 상속인은 고인의 재산 중 일정한 비율을 확보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다. 이를 ‘유류분’권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가족 생활의 안정, 가족재산의 공평한 분배라는 점을 고려한 것. 민법상 유류분 권리자는 증여 및 유증으로 인하여 그 유류분에 부족이 생긴 때에는 부족한 한도에서 그 재산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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