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현대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났다. <일요서울>은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가 지난 1995년 1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외화매입 가장 등으로 조성해 온 비자금 조성내역을 단독 입수했다. 이 자료는 대검 중수3과 공적자금비리합동수사반에서 현대전자 비리에 대한 수사를 벌여온 결과 드러난 것으로, 현대전자는 이 기간 동안 총 436억 여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자금은 고 (故) 정몽헌 회장의 지시하에 정 회장의 최측근이자 현대 비자금 총책으로 알려진 강명구 전 현대 엘리베이터 회장을 비롯, 장동국 전 현대전자 부사장, 김모 전 현대전자 고위관계자, 또 다른 김모 전 현대전자 고위관계자가 관리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비자금 중 상당액이 2000년 4·13 총선을 전후로 정치권에 흘러 들어갔을 의혹이 짙어 향후 정치권에 핵 폭풍이 예고된다.그동안 현대비자금을 관리해 온 것으로 알려진 고(故)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현대그룹 고위층 4명이 검찰에 기소돼 충격을 주고 있다.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이하 현대전자)의 비리사실에 대해 수사를 벌여 온 공적자금합동수사본부(검사 안성욱)는 1월 26일 강명구 전 현대엘리베이터 회장과 김모 전 현대전자 고위관계자, 또 다른 김모 전 현대전자 고위관계자 등 3명에 대해 횡령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고, 장동국 전 현대전자 부사장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현대전자 재직당시 1조원대의 분식회계를 통해 대출사기 및 유상증자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정작 관심을 두고 있는 혐의는 이번 수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비자금 횡령 부분이다.

특히 이들을 통해 조성된 현대전자 비자금 436억원의 실체 및 사용처가 최대 관심거리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정몽헌 회장의 비자금을 밝혀줄 열쇠인 것이다. 실제로 검찰은 예금보험공사로부터 현대전자의 분식회계 등에 대한 수사의뢰가 들어왔던 지난해 3월만 해도 ‘혐의 인정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며 난색을 표해 왔다. 당시 차동민 대검 수사 기획관은 “분식회계부분은 공소시효(3년)가 지나 별다른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며 “분식회계를 통한 허위공시 및 계열사 부당지원, 공금횡령 등 불법행위가 주 수사대상이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이번 현대그룹 고위층에 대한 검찰의 전격적인 사법처리는 현대 비자금 수사와 관련, 상당부분 이를 입증할 자신감이 있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본지는 이와 관련, 검찰이 강씨 등을 기소하면서 비자금 조성에 의한 횡령혐의를 증명하기 위해 작성한 <비자금 조성내역>을 단독 입수했다. 이 자료는 1995년 1월 10일부터 2000년 10월 27일까지 비자금을 조성한 일시 및 장소 피해금액, 횡령방법, 관련자 등이 자세히 기재된 것으로 총 8장 분량이다. 자료에 따르면 1995년 1월 10일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전자 서울사무소에서 김모 전 현대전자 고위관계자 등이 외화매입을 가장하여 총 4,000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19일 4,000만원, 24일 4,000만원, 2월 3일 4,000만원 등 총 289회에 걸쳐 436억 6,076만 7,078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검찰은 이 비자금 중 고(故) 정몽헌 회장이 직접 개입해 조성한 것으로 나타난 총 162건, 290억원 상당에 대해서는 구속영장에 날짜순으로 별도 기재하는 등 정 회장 비자금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현대전자를 통해 조성한 비자금의 절반이 넘는 액수로 정 회장의 별도 지시에 따라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은 금액이다. 검찰에 따르면 정몽헌 회장은 당시 현대전자 부사장인 장동국과 현대전자 서울사무소 소장으로 재정부서 업무를 관장하던 강명구 등과 공모하여 1996년 9월 19일부터 1997년 6월 20일까지 현대전자 사무소에서 외화를 매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마치 외화를 매입하는데 대금을 지출한 것처럼 허위의 전표를 작성하거나, 원부자재를 수입하는데 신용장개설비용 등을 지출한 것처럼 허위전표를 작성하여 총 83억 7,000만원 가량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또 정 회장은 1997년 7월 16일부터 1999년 5월 23일까지 같은 수법으로 143억여원 가량의 비자금을 조성하는가 하면, 1999년 11월 29일부터 2000년 1월 10일까지 같은 수법으로 7억 1,000여만원, 2000년 3월 3일부터 10월 25일까지 46억 9,000여만원, 2000년 8월 7일부터 10월 27일까지 9억여원 등을 조성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 비자금이 법인의 공적인 수입 및 경비 외의 용처에 사용됐다고 밝히고 있어 재판과정에서 정몽헌 비자금 조성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나타난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입을 열 경우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현대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대 엘리베이터의 회장을 역임한 강씨는 검찰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정몽헌 회장의 자살 이후 가장 관심을 끈 사람도 강 전 회장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자살을 결행하기 3일 전인 2003년 8월 1일 대북송금 관련 재판을 마친 뒤에 서울 청담동 소재 W술집으로 보성고 동기동창인 박기수 전 현대상선 미주본부장과 강 전 회장을 불러 놓고 이튿날 새벽 4시 30분까지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정 회장은 강 전 회장과 김윤규 사장,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등을 불러모아 자신의 유고 상황에 대비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실제로 생전의 정 회장이 회사 업무는 물론 집안의 크고 작은 일까지도 마음 놓고 얘기를 나눴던 사람은 강 전회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 내에서도 그동안 강 전회장이 정 회장의 의중을 가장 잘 읽어와 ‘강 회장이 하는 일은 곧 정몽헌 회장의 뜻’으로 인식돼 왔다.

이러한 강 전회장의 위치로 볼 때 적어도 정 회장이 자살하기 전에 강 전회장에게 현대 비자금과 관련한 별도의 지침이나 부탁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따라서 검찰은 현대전자 비자금 조성에 깊이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정 회장의 최측근 위치에서 정몽헌 비자금을 관리해 온 것으로 알려진 강 전회장만큼은 비자금의 용처를 누구보다 잘 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번 수사에서 검찰은 현대전자를 통해 비자금 조성이 활발했던 1999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기적 상황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 회장으로서는 대북사업 과 관련해 정치권에 로비가 필요했던 시기였으며, 정치권도 4·13 총선자금이 절실했던 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또 현대그룹 일가의 경영권 승계 다툼인 소위 ‘왕자의 난’으로 정 회장이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정·관계에 로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강 전회장 등을 상대로 비자금 사용처에 대해 집중 추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강 전회장 등은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에도 불구, 정 회장 핑계를 대며 끝내 현대전자 비자금의 사용처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에 따라 가담 여부가 확실하고 정 회장의 지시를 실무진을 통해 구체화시키는 등 책임이 무겁다고 판단한 강명구 전회장과 장동국 전부사장에 대해 1월 11일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강 전회장은 구속영장이 기각돼 1월 26일 불구속 기소된 상태다. 검찰 관계자는 “강씨가 구속될 것에 대비해 내복을 준비하고 구치소에 잘해 달라는 부탁 말을 넣는 등 담담히 구속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며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변호사 선임 후 구속영장이 기각됐다”고 말했다.

결국 현대 비자금의 사용처 부분을 둘러싼 검찰과 정몽헌 가신들의 공방전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강씨 등이 법원에서 폭탄선언을 하는 등의 돌발상황이 발생할 경우 2003년 내내 정치권을 흔들었던 현대비자금 사건이 또 다시 정치권을 강타할 수도 있다. 당시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현대로부터 비자금과 관련, 혐의를 받은 여야 정치권 인사만 해도 적게는 34명에서 많게는 89명까지 거론됐었다. 그러나 검찰은 “증거에 따른 수사만 원칙으로 한다”며 “(사용처에 관한) 구체적인 진술이 나온다면 진위를 확인하겠지만 무리한 수사로 정치권에 파장을 일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코리아 음악방송·KM뮤직에 612억 부당지원

고(故) 정몽헌 회장이 장동국 현대전자 부사장 등 자신의 측근들과 공모, 현대전자의 계열사인 코리아음악방송(주)와 케이엠 뮤직(주)에 총 612억 2,000여만원을 부당 지원한 것으로 검찰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 금액은 1998년부터 2000년 사이에 현대전자를 통해 집중 지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코리아음악방송과 케이엠 뮤직은 1995년부터 이미 사업전망이 전무하고, 자금을 지원 받더라도 이를 상환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 회장 등은 현대전자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사회의 결의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당 자금지원을 계속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정 회장 등은 1998년 9월 29일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전자 서울 사무소에서 현대전자가 울산종금 어음을 매입해 주고, 울산 종금은 그 어음 매입금으로 코리아음악방송어음을 할인해 주는 방법으로 코리아음악방송에 총 14억원 상당을 지원했다. 또 1999년 1월 29일에도 코리아음악방송에서 발행된 CP를 현대전자가 울산종금을 통해 매입해 주는 방법으로 총 12억 9,000여만원을 부당 지원하는 등 모두 16회에 걸쳐 571억여원 상당의 재산상 이득을 취하게 했다. KM뮤직의 경우 정 회장은 KM뮤직에서 발행한 CP를 현대전자가 울산종금을 통해 매입해 주는 방식을 택했다. 정 회장은 1998년 12월 2일부터 1999년 5월 12일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KM뮤직이 총 41억여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취하게 했다. 한편, 케이엠 뮤직은 1993년 6월 현대전자가 현대음향(주)를 인수한 것으로, 1997년 4월부터 케이엠 뮤직(주)로 상호가 변경된 회사다.

기소된 현대그룹 전·현직 고위 인사들 반응

강명구 전회장 ‘침묵’강명구 전회장은 이번 현대전자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 일체 언급을 피하고 있다. 검찰은 당초 강 전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에서 기각되자 1월 26일 불구속 기소했다. 강 전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집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했지만 부인이 전화를 받아 “집에 있지 않다”며 “내가 뭐라 말 할 입장이 못된다”고만 밝혔다. 그의 변호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 세종에서도 “의뢰인에 대해서는 일체 얘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장동국 전부사장 ‘반발’현재 구속 수감중인 장동국 전부사장은 검찰 조사에서 “이 사건 관련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한 바 없고, 주된 책임은 정몽헌 회장 등이 져야 한다”고 반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씨는 또 부당지원 배임 사건에 대해서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은 “회계, 재정부서 업무를 총괄하던 임원으로서 분식회계, 비자금 조성 횡령의 실무를 주도하는 등 책임이 무겁다”며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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