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위해 일했지만 살생부에 올랐다”

▲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일요서울 | 홍준철 기자] 국정원(전 안기부)이 재차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 이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수사 당시 ‘외압’을 폭로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7.30재보선 광주 광산을 전략공천되면서 정치권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DJ 정권 때 강제해직 당한 400명의 전직 국정원 직원들이 일간지 광고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명예회복을 시켜달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호남 정권이 들어서면서 특정 지역 출신들을 대상으로 ‘살생부’ 명단을 만들어 내쫓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진상을 알아봤다.

- DJ 정권 33일만에 영남 출신 400여명 숙청 ‘인사 참사’
- 국정원 파견인사 “감옥에 안간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최근 한 일간지에 하단에 ‘대통령님, 국정원장 내정자님, 강제퇴직 간부들에게 명예회복을 시켜 주십시오’라는 제하의 광고가 게재돼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국정원 강제퇴직 진상규명촉구위원회(회장 전경숭) 명의로 게재된 이 광고는 97년 DJ정권이 들어선지 33일만에 영남 출신 비호남간부 400여명이 보직해임되는 인사 참사가 발생했다며 ‘억울하다’는 심경을 담고 있다.

실제로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정권을 잡은 직후 국정원 요원 581명을 보직해임시켰다. 당시 주도는 이종찬 국정원장과 이강래 기조실장이 담당했다고 이들은 증언했다. 국민의 정부는 ▲ 97년 북풍공작 사건 연루자 ▲ 권영해 전 안기부장 인맥 ▲ DJ 납치 사건 연루자 ▲ 김현철.김기섭 인맥 ▲ 서청원, 박관용, 정형근 등 이회창 대선 후보지지 인사 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됐다.

구체적인 사례로 △ 3급 경남 출신 정형근 직계 인사 △ 경남 출신 2특보 YS계로 분류 △ 경기 출신 2급 북풍공작사건 연루 혐의 △ 경남 출신 3급 DJ 중병설 유포 혐의 △ 경남 출신 1급 오익제 편지사건 DJ 관련설 유포 △ 1특보 부인이 권영해 부인과 친분 의혹 △ 서울출신 1급 이회창 선거활동 혐의 등 사감이나 정치적 보복성 성향이 강한 ‘특정 지역 출신과 반대 정파 인사’등이 강제 퇴직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정원 강제 퇴직 인사들은 1999년초 서울행정법원에 면직 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는 국정원이 패소했다. 하지만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임명되면서 국정원은 2, 3심 법원에서 승소해 복직은 사실상 힘들게 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후 강제퇴직자들은 박형준 홍보수석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했고 2008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국정원 자체 진상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MB 정권 출범 초대 김성호 국정원장은 일부 강제퇴직자들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했지만 조사내용은 발표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국정원 강제 퇴직자중 한 인사는 11일 일요서울과 통화에서 “전직 국정원 간부 모임인 양지회 회원들과 가진 비공개 석상 미팅에서 김 전 국정원장은 ‘강제퇴직 사건관련 일부 불법적인 사실이 드러나 안타깝다’며 국정원의 잘못이 일부 있음을 시인했다”며 “당시 전현직 안기부 직원 47명을 조사하고 4천페이지 넘는 보고서가 작성됐지만 유야무야됐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어 이 인사는 “14년간 소송을 하며 지고 이기고를 반복하고 있다”며 “국가를 위해 일을 했고 순기능 역할도 많았는데 전체가 매도당하고 있어 억울하다”고 전했다. 나아가 “400명중에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정치공작이나 사찰을 한 인사들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이병기 신임 국정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만 국정원장 의지로 안되고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당시 안기부에 근무했던 전직 직원 P씨의 주장은 달랐다. P씨는 “국익을 위해 일하다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도 존재한다”며 “그러나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핵심부서에 자리잡고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 정치권에 학연, 혈연, 지연으로 줄을 데 승승장구한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DJ 인사 “안기부 해체하려다 말았다”

이어 P씨는 “DJ 정권이 들어서 향후 걸림돌로 작용할 인물들을 사전에 싹을 자르거나 승진을 위해 라이벌을 제거하는 기회를 삼아 당한 사람들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며 “‘특정지역이라 차별당했다’, ‘정치적 보복이다’는 일괄적인 잣대로 볼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보수 정권인 MB 정권으로 교체됐지만 강제퇴직자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힘든 배경 역시 구체적인 불이익 사례가 미약하고 체계적인 접근이 힘들어 손 놓고 있었을 것”이라며 “설득력과 명분에 있어 좀 약한 측면이 있다”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한편 DJ 정권 당시 안기부에 파견 근무를 나갔던 전직 보좌관 K씨는 “감옥에 안 간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라며 ‘말도 안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K씨는 강제해직자 수가 너무 많은 게 아니냐는 지적에 “400명까지는 모르겠지만 2~300명이 넘는 국정원 직원이 파면내지 면직 된 것으로 안다”면서 “하지만 DJ 정권이 들어서기전부터 국정원 특히 국내 정보 파트 인력이 너무 많았던 게 사실”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K씨는 “당시 국정원 국내 정보 파트 인력이 중앙 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사기업 등 없는 곳이 없었다”며 “오죽하면 국회의원들이 국정원 직원이 부르거나 오면 독대를 했겠느냐”고 반박했다.

이 인사는 “요즘은 국회 보좌관도 국정원 직원들이 만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당시는 국정원 직원들의 정치인 사찰이 심각했고 이로 인해 금배지들이 해꼬지를 당할까봐 직접 만나고 눈치를 보고 그랬다”고 엄혹한 현실을 전했다. K씨는 “너무 안기부가 국내 정보 기능이 강화대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나아가 이 인사는 대선을 앞두고 터진 97년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필두로 북풍 공작사건에 연루된 인사들, YS 차남과 결탁한 김기섭 등 YS 정권 탄생에 일조한 인사,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한 세력, 정치 공작을 일삼았던 인사 등을 솎아낼 필요도 있었다고 인정했다. 오히려 그는 “ DJ 정권이 들어서기전부터 야당은 ‘안기부 해체’를 주장해 왔다”며 “게다가 불법적인 정치공작도 있었지만 직권 면직시키고 감옥에 보내지 않은 것만도 고맙다고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국정원 전 직원 “명예회복 쉽지 않을 것”

사실상 국정원 강제퇴직 인사들의 ‘명예회복’을 박근혜 정권이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국정원 전 직원 P씨 역시 “국정원이 과거에는 억울하게 나간 선후배에 대해서 동정심이나 연민이 존재해 알게 모르게 도와줬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시간도 많이 흘렀고 지금은 국정원 조직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데다 과거처럼 선배에 대해 생각하던 사람들도 다 나가 명예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동조했다.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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