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생 장은실 1
1. 낯뜨거운 머리얹기
“은실아, 준비 되었느냐?”
달성권번의 큰 언니 농산(弄珊)이 처녀 기생 은실이를 재촉했다.
“아직 5시도 안되었는데요.”
은실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은실이는 오늘 밤 처음 머리를 얹는다. 상대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갑부 집안의 아들이었다. 돈도 많을 뿐 아니라 세도가 당당하여 눈에 났다가는 권번 장사도 어렵게 될 판이라서 농산은 무척 신경을 썼다.
인력거 조합에서 전화가 온 것이 점심때 조금 지나서인데 그때부터 농산 언니는 서둘기 시작했다.
인력거 조합은 기생을 태워다 대령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요정에서 연락을 받으면 권번에 알려주고 몇 시에 대령할 것인가를 상의한다.
은실은 하서동에 있는 달성 권번에 들어온 지 꼭 2년째였다.
그동안 예절, 노래, 춤, 서화, 시조까지 여러 가지를 피나게 익혔다. 오늘 처음으로 머리를 올리러 가는 것이다.
40여명의 달성 권번 식구 중에 인물과 재주가 뛰어난 은실이 거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
“인력거 대령입니다.”
권번 집사 박영감이 농산에게 전갈했다.
“곧 나간다고 일러라.”
농산은 단장을 마친 은실의 옷매무새와 화장한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연두색 저고리에 붉은 고름, 남빛 끝동이 돋보였다. 금박 다홍치마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더욱 빛나게 했다.
편발 머리도 오늘 밤을 지나면 쪽을 지게 될 것이다.
“머리 얹는 기생이 첫날밤 남자를 어떻게 모시는지 알지?”
평소에 수십 번 가르친 일을 농산이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예.”
대답하는 은실은 입을 꼭 다물었으나 눈동자는 슬픔을 머금었다. 은실의 마음을 얼른 알아차린 농산이 은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든 게 팔자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다녀오겠습니다.”
마음을 추스린 은실은 인력거에 올랐다.
“혼마찌(本町)의 해동원입니다.”
인력거꾼이 쓰고 있던 도리우찌(납작하고 둥근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 겸 안내 말을 했다.
물론 은실이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인력거는 씽씽 바람을 내며 혼마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성 권번 은실이 듭니다.”
해동원의 노기 월선(月仙)이 문밖에서 먼저 기척을 했다. 월선은 10여 년 전에 은퇴하여 해동원에서 노기 행세를 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명창으로 이름을 날려 부잣집 잔치에 엄청난 값으로 불려 다녔다.
월선의 기둥서방은 대구부사를 지낸 양반이었으나 부사가 죽고 나자 그것도 머리 얹어 준 기둥서방이라고 수절하고 살았다.
“어험, 들어오너라.”
은실이를 부른 성 부잣집 막내아들 중석(重奭)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헛기침까지 하였다. 이제 겨우 스물을 갓 넘은 애숭이지만 기생 다루는 데는 이력이 났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퇴짜를 놓는 경우가 많아 점잖은 기방 한량들이 얼굴을 찌푸리는 상대였다. 그러나 워낙 대단한 집안 배경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은실이라고 하옵니다.”
은실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섰다. 두 손을 가지런히 머리에 얹고 큰 절로 인사를 하며 이름을 말했다.
중석은 절하느라 숙인 은실의 얼굴을 빨리 보려고 자기도 고개를 낮추고 들여다보았다.
“음, 듣던 대로 상판대기는 얍사하고나. 하하하.”
중석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은실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은실이 해동원으로 오기 전에 같은 권번의 친구이며 선배인 종심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 해동원에 간다면서?
- 오늘 밤 만나는 사람이 예사 놈이 아니야.
- 대구에서 소문난 건달이야. 왜놈 간에 붙어서 거들먹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거칠고 뛰어나다고 소문난 놈이야.
- 은퇴한 언니들은 그 놈하고 한번 하는 게 소원이란 여자도 있어.
- 여자를 거칠게는 다루지만 아주 죽여주는 기술이 있다는 거야.
- 조심해야 돼. 오늘밤 머리를 얹으려고 할텐데 호락호락 넘어가지 말고 챙길 건 다 챙긴 뒤에 응해주어.
- 얼마나 소중한 은실이 정조냐.
은실은 종심이가 해주던 말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조금씩 긴장되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그렇게 요란한 소문이 났을까하고 궁금해지기도 했다.
은실이 단정하게 마주 앉자 곧 떡 벌어진 진수성찬 안주상이 들어왔다.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은실은 은주전자를 들고 중석을 바라보았다.
뭉툭한 코에 당나귀 같은 귀가 눈에 들어왔다. 웃음을 치는 눈은 심술이 가득한 것 같았다.
“한잔만 올린다고?”
“아이 서방님도, 어찌 한 잔뿐이겠습니까?”
중석이 무조건 시비를 거는 것을 은실은 그냥 농담으로 받아 넘기려 했다.
“술이나 마시자고 니 부른 기 아이다. 자 내 옆에 와서 앉아라.”
중석이 술잔을 받아들고 한손으로 은실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이, 서방님 성미도 급하셔요. 우선...”
은실이 웃으며 손을 슬쩍 뽑았다. 그러나 중석의 성정을 잘 모르고 한 실수였다.
“허어, 이년이 뺀다.”
은실은 갑자기 태도가 변한 중석에게 놀라 당황했다. 그러나 각오한 일이라 다시 웃으며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내가 니 서방 될 사람인데 뺐어?”
“서방님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시꺼, 이년아. 빨리 다소곳이 자빠져 봐.”
중석은 거칠게 은실의 가슴을 밀어 쓰러뜨렸다. 그리고 손을 저고리 섶으로 집어넣고 가슴을 주무르려고 했다.
“서방님, 천천히 하세요. 서방님...”
당황한 은실이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저고리 섶을 헤치고 들어오는 손을 움켜쥐었다.
“허허, 이년이 그래도 앙탈이네.”
중석은 더 거세게 가슴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은실이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다시 앉았다.
은실은 참았다. 권번(券番)에 들어 올 때는 이런 수모쯤은 아무것도 아니려니 하고 각오는 했지만 막상 이런 남자를 만날 줄은 몰랐다.
“서방님 성질도 급하셔요. 우선 술 한 잔 받으시고 제 노래도 한가락 들으시고 천천히 밤을 즐기셔요.”
은실이 일부러 소리를 내 웃으면서 술을 다시 따뤘다. 그러나 입술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양이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 성씨네 막내는 소문난 난봉꾼에다 성질하나 더럽다고 소문났으니까. 그러나 어쩌랴. 한번 찍으면 피하지 못하는 세도가 아들인지라...’
은실은 권번을 나서기 전에 농선 권번장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무조건 참아야한다고 다시 다짐했다.
“서방님, 제 술 한잔 우선 받으세요. 아직 밤은 길어요.”
“내가 술 마시려고 온 줄 아느냐? 구렁이 알 같은 돈 한 시간에 5원씩이나 주고 너를 부른 것이 술이나 따르라고 부른 줄 아느냐.”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 중석이 다시 은실을 방바닥에 쓰러트리고 이번에는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중석의 손은 속치마와 단속곳을 헤치고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 거칠게 헤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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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