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생 장은실4
월선이 은실의 손을 잡으면서 함박웃음을 띄고 말했다.
“해동원에서요?”
“그래. 전에 일은 없었던 걸로 할 모양이다. 성 도련님이 너한테 한 눈에 반했나 보구나.”
은실은 아무 말도 않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다시 머리를 올리겠다는 뜻이라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기생이 한번 머리를 얹으면 기둥서방도 서방이라 그 남자에게 매여야 한다. 과연 성중석이라는 개망나니에게 일생을 매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죄송하지만 성중석 서방님이 다시 제 머리를 얹겠다고 하신다면 사양하겠습니다. 기생 주제에 사양이 어디 있겠냐고 나무라셔도 달게 꾸중을 받겠습니다.”
“뭐라고 그게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월선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네가 지금 권번에서 떠나야 할 큰 죄를 지었는데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 기생이 남자를 내치다니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은실은 그냥 고개만 숙였다.
“다시 생각해 보아라. 내 화류계 생활 30년에 너 같은 아이 처음 보았다. 네 앞길을 네가 망치다니.”
“...”
“성중석이 너한테 단단히 반한 모양이니 모른 체하고 받아줄 수 없겠느냐?”
월선이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
“저를 죽여주세요.”
“이런 맹랑한...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어떻게 뒷감당을 하나 두고 보자.”
월선은 버럭 화를 내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방을 나가버렸다.
은실은 겁이 덜컥 났다. 무슨 배짱으로 거절을 했는지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실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을 열고 찻값을 치른 뒤 거리로 나섰다.
은실은 착잡한 심정으로 하서동 달성 권번까지 걸어갔다. 권번 문 앞에 이르자 문득 황경욱이 생각났다. 황경욱은 은실의 고향 사람이었다. 어릴 때 집을 나와 동경에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 독립 운동하는 비밀 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사대장 황병기 밑에서 지내고 있었다.
황병기 대장의 먼 친척벌이기도 한 경욱은 한때 김울산이 세운 복명학교에 같이 다니기도 했다.
은실은 발길을 돌려 아미산 언덕배기에 있는 김울산의 사무실로 갔다. 경욱과 황병기 대장 등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은실이가 왔구나.”
김울산은 은실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이 일흔에 가깝지만 아직도 학교 운영이나 어려운 사람 돕는 자선 사업에 분주한 할머니였다.
김울산 여사는 울산 출신으로 대구로 시집 와서 결혼에 실패하고 자수성가한 당대 제일의 여류명사였다.
요정을 운영해 돈을 모은 뒤 여러 가지 사업에 손대 크게 성공하였다. 거금을 손에 쥔 김울산은 뜻있는 일을 하기 위해 나섰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남몰래 힘을 쓰기도 했다.
김울산은 교육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생각에 명신(明新) 여학교를 세워 다른 사람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2년도 못가 학교가 경영난에 빠지자, 거금을 들여 학교를 다시 인수하고 교명을 복명(復明)으로 바꾸었다. 조국 광복의 꿈을 담아 지은 교명이었다.
“장은실이 왔구나.”
옆방에서 황경욱이 문을 열고 나오며 은실이를 반겼다.
황경욱이 반가워하며 은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두툼한 손이 어께에 닿자 은실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은실은 경욱의 손에서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욱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냥 고향 친구로서, 같이 보통학교에 다닌 동창으로만 생각해왔는데, 오늘은 느낌이 예전과 달랐다.
은실은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경욱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권번 생활은 할 만 하냐?”
경욱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직 쪽지은 머리가 아닌 걸 보니 머리는 얹지 않았구나. 기왕 나섰으면 철저하게 해야 해. 프롤레타리아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되지.”
당시에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듣자 은실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모두 한 곳을 향해 달리는데 자신만 엉뚱한 곳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생이 무슨 프롤레타리아야? 남자들의 하룻밤 노리개일 뿐인데.”
6. 기생 치마속의 비밀
은실은 자기 처지에 슬그머니 화가 나서 내뱉듯이 말했다.
“여, 은실 학생이 왔구먼.”
그때 안방에서 황병기 대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덥수룩한 턱수염이 검정 두루마기, 검은 중절모와 잘 어울렸다.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사대장답게 당당해 보였다. 황병기의 뒤에는 가냘픈 양복 차림의 청년이 따라 나왔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 남자는 조선국권회복단의 외교부장 서상일이었다.
그때였다.
사무실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일본 헌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꼼짝 말아라! 우리는 대구 헌병대에서 왔다.”
일본 헌병들은 대검이 꼽힌 장총을 들이대며 군화를 신은 채 사무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네가 황병기지?”
헌병 한 사람이 황 대장을 지목하고 대검 끝을 황 대장의 목에 바싹 가져다 댔다.
“그렇소. 그런데 이 총칼 좀 치우고 이야기합시다.”
황 대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두루마기 옆구리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지도 않고 말했다.
은실은 놀라 가슴을 쓰다듬으며 사무실 의자 뒤 벽에 기대섰다.
“코노야로. 지집년도 있구나. 이 불령선인들 모조리 연행한다.”
황병기 대장을 앞세우고 황경욱, 서상일, 그리고 은실이는 사무실에서 끌려나왔다.
일행 네 사람은 헌병들한테 에워싸인 채로 혼마찌(本町))에 있는 일본군 주둔지의 대구헌병대로 끌려갔다.
“이 여자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달성권번 기생이니 보내주시오.”
황경욱은 헌병 조장을 보고 말했다.
“시끄러워. 아랫도리 팔아서 독립군 자금 대주는 기생년이 있다는 소문 몰라?”
"말씀이 지나치오.“
“코노야로. 이년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 폭탄을 쑤셔 넣고 다니는 기생년도 보았어. 흐흐흐...”
“폭탄 맛이 내 물건 맛만 했을까?”
헌병 조장이 은실의 허리와 그 아래로 음흉하게 눈을 굴리며 말했다.
“이놈아 그러 소리는 네 여편네 벗겨놓고 해라.”
참다 못한 황병기가 쏘아붙였다.
“요씨. 너 오늘 잘 걸렸다.”
헌병 조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상일 당신은 옛날 불순단체 조선국권회복단의 외교부장이었고, 황병기(黃炳基)는 결사 대장이었지? 웃긴다 웃겨. 너 같이 도로보 처럼 생긴 놈이 무슨 결사대장이냐?”
헌병조장은 들고 다니는 말채찍으로 서상일(徐相日)과 황병기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모욕을 주었다.
“네놈 같은 졸자하고는 이야기하기 싫다. 너희 대장을 만나게 해 달라.”
황병기가 조장의 채찍을 휘어잡아 확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그 바람에 조장이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조장은 가까스로 일어서더니 황병기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황병기가 조장의 팔목을 재빠르게 꽉 잡았다. 조장은 황병기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
“이 조센징 새끼 죽여 버릴 거다.”
조장이 허리에 차고 있던 군도를 뽑아들었다.
“뭐하는 짓들이냐?”
그때 지켜보고 앉아 있던 헌병 장교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서상일 선생과 황병기 선생 아니오? 벌써 형을 다 살고 나온 거요? 만주 여행 갔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언제 대구에 왔습니까?” 펄펄 뛰던 조장은 부동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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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