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생 장은실5
“미야자끼 중위, 그간 안녕하시오.”
서상일이 점잖게 인사를 했다. 몇 년 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을 때 취조를 하던 장교였다.
“안녕하지 못하오. 요즘 소위 조선국권회복단 옛날 단원들이 김울산 할머니 사무실에 자주 출몰한다던데... 이 기생은 왜 끼어들었소?”
장교가 싱글싱글 웃으며 은실이를 가리켰다.
“은실이는 아무 상관없는 달성권번 기생이오. 김울산 할머니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우리와 만난 것일 뿐이오. 그러니 집으로 보내 주시오.”
황경욱이 장교를 보고 말했다.
“여기 한번 들어오면 쉽게 나가는 곳이 아니오. 무슨 임무를 가지고 접선하러 왔는지 밝힌 뒤에 죄가 없으면 내 보내지요. 오이, 야먀다, 이 기생을 다른 방에 데리고 가서 조사해 보아라. 치마속 깊숙이 독립군 기밀문서라도 숨겼는지 철저히 검색 하도록.”
“하이!”
행패를 부리던 조장이 은실을 데리고 히죽이 웃으면서 복도로 나갔다.
은실은 헌병대 취조실에 들어가 야먀다 조장과 단 둘이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하얀 벽에는 일장기만 덜렁 걸려 있을 뿐 아무 장식도 도구도 없었다.
“오이, 이름이 뭐야?”
“장은실입니다.”
“장은실! 일어서서 옷을 모조리 벗어!”
은실은 어이가 없어 야마다 조장을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
“조사할 것이 있으면 조사만 하면 되지 옷은 왜 벗으라는 거예요?”
“잔말이 많다. 국권회복단인가 뭔가 하는 자들에게 전달할 돈이나 서류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걸 찾아내려는 거다.”
“그럼 우선 이걸 보세요.”
은실이가 들고 다니던 조그만 손가방을 탁상위에 내 놓았다. 조장이 손가방을 열고 거꾸로 들어서 탁상 위에 주룩 쏟았다. 꽃무늬 손수건과 코티분갑, 그리고 몇 가지 화장품과 가운데 구멍이 뚫린 5전짜리 일본 동전 몇 개가 나왔다.
“속옷 속에 감춘 것이 분명해. 벗지 않으면 내 손으로 벗길 것이다.”
조장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정말 덤벼들어 옷을 벗길 듯한 태세를 보였다.
“치마속 사루마다 속에 돈주머니 숨기고 다니는 독립군 밀정들을 내가 많이 잡았거든.”
조장은 은실의 필사적인 저항을 뿌리치고 스커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팬티 속을 더듬으려고 했다.
“살려 주세요. 누구 없어요?”
은실은 죽을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다가 죽을힘을 다해 조장의 사타구니를 힘껏 차버렸다.
“헉!”
조장이 비명을 지르며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은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복도로 뛰어나가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주세요.”
흐트러진 머리에 웃옷은 없이 속블라우스가 다 찢긴 채 비명을 지르며 복도로 뛰어나온 은실이를 목격한 초병이 달려왔다. 은실은 초병의 팔을 붙들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살려 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초병은 옷이 찢긴 채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여자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지나가던 장교 한 사람이 다가섰다.
“무슨 일인가?”
초병이 차렷 자세를 하고 경례를 붙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7. 망난이의 순정
은실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장교가 사태를 짐작한 듯 다시 말했다.
“내 방으로 데리고 와”
은실은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 장교의 방으로 갔다. 은실은 장교가 내주는 남자의 유카다(목욕복)를 걸쳐 드러난 상체를 가렸다.
은실이 대구 헌병대에서 밤늦게까지 풀려나지 못하고 똑 같은 조사를 몇 번이나 받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유카다를 빌려준 장교가 다시 불렀다. 그 방에는 반가운 사람이 와있었다..
“큰 언니...”
거기에는 해동원의 월선이가 와 있었다.
“공연한 고생을 했구나. 자, 집으로 가자.”
월선은 은실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중위님, 이제 가도 되지요?”
월선이 장교를 보고 말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해동원 기생이라고 말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마담상, 미안 하오”
은실은 헌병대를 나와 대기해 놓은 택시를 타고 달성 권번으로 향했다.
“고마워요. 큰 언니.”
은실이 택시 안에서 인사를 하자 월선이 뜻밖의 말을 했다.
“있다가 농산 형님이 말하겠지만 자네를 빼낸 사람은 따로 있다네.”
“따로 있다니요? 김울산 할머니인가요?”
월선이 한참 있다가 택시에서 내려 차삯을 치른 뒤에 입을 열었다.
“자네를 빼낸 사람은 성중석이라네.”
“옛? 성 서방님이라고요?”
은실은 기겁하도록 놀랐다. 그렇게 망신을 주고 다시 머리 얹겠다는 것도 거절했는데 은실의 뒤까지 봐 주었다니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제 무슨 요구를 해와도 거절하기가 어렵겠네요.”
이게 순정인가, 계략인가? 은실은 성중석의 속셈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싫던 성중석의 미소진 얼굴이 어른거리자 고개를 흔들었다.
“헌병대에 한번 끌려가면 죄가 있건 없건 모두 욕을 보게 된다네. 더구나 여자들이야 무사히 풀려난다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지.”
월선은 은실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두 사람이 권번에 들어서자 농산 권번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쯧쯧쯧, 어린 것이 곤욕을 치렀구나. 방에 들어가 옷부터 갈아입어라.”
은실은 방안으로 들어가 치마저고리로 갈아입고 나왔다. 농산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기생이 기생 일보다 다른 일로 더 이름이 나겠구나. 어쨌든 좋은 일은 아니다. 헌병대의 조선인 장교로부터 연락을 받고 마침 여기 왔던 성중석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 어쨌든 신세 한번 지게 된 것이다.”
농산은 담담하게 말했으나 부담을 느끼는 것 같은 눈치였다.
“성 도령이 왜 또 왔었나요?”
은실이가 농산을 보고 물었다.
“여기 쪽지를 써놓고 갔으니 읽어 보아라.”
농산이 책상에서 여러 번 접힌 쪽지를 꺼내주었다.
“성 도령이 너한테 단단히 반한 것 같더라. 남자란 잘 꺾이지 않는 꽃은 꼭 꺾으려 드는 것 아니냐?”
“아이, 큰 언니도, 제가 뭐 꽃 축에나 들어갑니까?”
월선의 말에 은실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월선은 다른 방으로 건너가 성중석이 남기고 간 쪽지를 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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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