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생 장은실9

2025-05-23     이상우 작가

“새싹 배당금 8백 65배.”
“우리 은실씨 갑부 된다.”

중석이 펄쩍펄쩍 뒤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모두 중석 씨 돈이니까 저는 상관없어요.”
은실의 진솔한 속마음이었다. 중석이 돈을 대 줄때부터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석은 펑펑 돈을 쓰고 다니는 건달이니까 ‘내가 좀 없애주마’ 하는 심정으로 엉뚱한 말에 몽땅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일이 생겨 건달 부자를 더욱 부자를 만들어 주고 말았지 않은가.

“은실 씨가 마음대로 골라서 마권을 선택한 것 아니오? 나는 다만 말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은실에게 10원을 준 것 뿐인데...”
새싹은 그 뒤 경마장의 명마로 이름을 날렸다. 새싹이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후다바(雙葉)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까지 했다. 후다바란 새싹의 일본 말이었다.
은실은 새싹 덕분에 8천6백 50원이라는 거금이 생겼다. 중석에게 원전인 10원을 돌려 주어도 엄청난 돈이었다.

경마장의 말 한마리가 1천 2백원 정도 했으니까 경주마 여섯 마리를 사도 남는 돈이었다.
“현금으로 다 받을 수도 있지만 거북스러우니까 기미시장 취인권으로 받는 것이 좋겠군요.”
중석이 권유했다. 
“기미시장이 뭐예요?”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은실이 물었다.

“쌀 도매상인데 대구에서 거래되는 모든 쌀은 이곳을 거치게 되지요. 취인권(取引券)이란 쌀을 보관했다는 영수증 같은 것인데 은행에 돈을 넣어 놓는 것 보다 훨씬 좋아요.”
은행의 수표보다는 현물을 좋아하는 당시 사람들의 취향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쌀 가마였다. 물건의 기준을 삼을 때는 쌀 몇 가마, 혹은 벼 몇 석이라는 단위를 들이대야 감을 잡는 것이 서민들이었다.

대구 기미(期米)시장이란 야마도마찌(大和町)에 있는 미곡취인소(米穀取引所)를 말한다. 일본인들이 만든 곡물 경매장이었다. 대구에 있는 30여 군데의 쌀 상점들은 모두 이 기미시장에서 경매로 쌀을 사다가 팔아야 ㅤㅎㅔㅆ다.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 정부는 모든 물가를 통제하는 수단의 하나로, 물가의 기준이 되는 쌀값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미곡 가격이 경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도박성이 대단히 높았다. 경마보다 한 수 위의 도박장이라고도 했다.

대구 기미시장의 쌀 경매 기준가는 일본 나고야등지의 쌀값을 기준으로 경매가 되어 조선에서만 통용되는 기본 물가를 형성하지 못하게 했다.
은실은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중석의 말을 따라 미곡 취인권(取引券) 8천 6백50만 원어치를 받았다. 은실은 지갑에 그것을 넣으면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기미시장에서 최고가가 되었을 때 되 팔면 큰돈이 될 수 있어요.”
중석이 곁에서 계속 기미시장에서 돈 버는 방법을 설명했으나 은실은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권번까지 데려다 줄게요.”

은실은 중석의 차를 타고 권번까지 가서 내렸다. 
중석과 헤어진 은실은 다시 지갑을 열어보았다. 문서 쪼가리 한 장이 과연 8천원이 넘는 엄청난 돈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생으로 온갖 수모를 참고 벌어 보아야 한 시간에 1원 50전이다. 8천 2백원을 벌자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인가.
‘이게 정말 내 돈일까? 내가 횡재를 했단 말인가?’

은실은 권번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인력거를 불러 타고 어딘가로 급히 갔다.
은실이가 인력거를 타고 찾아간 곳은 김울산 여사의 사무실이 있는 복명학교 재단이었다. 전번에 갔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 곳이었다. 

김울산 여사는 보이지 않고 사무직원인 젊은 총각만 있었다. 은실이가 여러 번 보아서 안면이 있는 찬길이라는 젊은이였다. 얼굴을 온통 덮은 여드름만 없다면 괜찮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안녕하세요.”
은실이가 인사를 하자 순진한 젊은이는 얼굴이 공연히 빨개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어, 어서 오이소.”
“선생님은 안 계실 것이고, 혹시 황선생 소식 들었나 해서요.”

은실이가 황 선생이라고 한 것은 황병기 조선국권회복단 결사대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밑에 있던 고향 청년 황경욱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헌병대에 있나 봐요. 경성으로 보낸다는 말도 있심더.”
“아니 경욱 씨가 무슨 큰 죄인인가 뭐.”

은실의 실망스러운 얼굴을 보고 찬길이가 다시 말했다.
“아아, 황경욱 씨 말입니꺼? 그 사람은 벌써 나왔어예.”
“병욱씨가 풀려 났다고요? 그래,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은실이가 반갑게 물었다.

“아오끼 병원에 간다고 캤심더.”
“아오끼 병원? 무라가미죠에 있는 일본 사람병원?”
“예.”
황경욱.

철없던 일곱살때의 첫사랑이었다.
은실과는 달리 거시기를 달고 있는 경욱이 무척 부러웠다.
“경욱아 나는 왜 그게 없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의 그것을 내 보이던 어린 시절.
그 생각에 은실도 낯이 붉어졌다.                                                    

10. 기생의 짐승 같은 세월
      
바쁜 걸음으로 아오끼 병원에 도착한 은실은 병실에서 황경욱을 만났다. 그곳에는 종심이가 먼저 와 있었다. 환자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환자복에 무슨 모자예요?"
은실이가 걱정스럽게 황경욱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처가 조금나서...”
“모자 좀 벗어보세요.”

“흉터 생길만한 상처는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다리도 약간 불편하지만 뼈가 상한 것은 아니니까?”
“서상일 선생님과 황서대장님은 아직 헌병대에 계시죠? 나오기 어려울까요?”
“나오기 어렵게 될까요?”

종심은 황경욱의 붕대를 매만져주며 말했다.
“왜놈들 마음먹기 달린 일 아니겠어요.”
경욱은 말해 놓고 길게 한 숨을 쉬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은실이가 물었다.

“우선 고향에 가서 며칠 쉴까 하는데... 아마 어머니가 아시면 크게 걱정하시겠지요?”
경욱이은 말해 놓고 고개를 떨구었다. 경욱의 아버지는 일찍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에서 문학 운동 한다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골집에 남은 어머니가 머슴 두 명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겨우 가계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몸조리나 한 뒤에 고향에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어머님이 이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마음 상하시겠어요.”
은실이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왜놈 헌병이나 고등계 형사들이 눈독을 잔뜩 들이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디 편히 쉴 곳이라도 있겠어요?”

“제가 당분간 있을 곳을 한번 마련해 볼게요.”
은실의 말에 놀란 사람은 황경욱이 아니라 종심이였다.
“은실이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은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병실을 감시하는 일본 형사의 그림자가 있는 것 같아 은실은 간단히 병 문안을 끝내고 병원을 나왔다. 우울하고 착잡한 심정이었다. 은실의 발길은 다시 농산 언니의 권방으로 향했다. 권방으로 가면서 은실은 문득 자기가 엄청난 부자라는 것을 생각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