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생 장은실10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할 것인가?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먹으면서 호화 생활을 한다? 아니 부모님을 호강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동네를 위해서 써야하지 않을까?
은실은 그러다가 문득 황 선생의 하는 일이 생각났다. 나라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자기와는 먼 딴 세상의 일 같았다. 병아리 기생 주제에 무슨 나라 생각인가? 아직도 돈 많은 건달들에게 벌거벗고 누워서 그들의 야욕이나 채워주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은실은 권번장 농산 큰언니 방으로 들어가서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
“그래, 별 일은 없었나?”
농산은 무엇인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은실의 얼굴에서 읽어냈다.
은실은 머릿속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실은, 돈이 좀 많이 생겼습니다.”
“성중석 서방님이 주었냐? 함부로 큰돈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쯤 너도 알겠지.”
농산이 지레짐작으로 낭패라도 당한 듯이 말했다.
“큰돈은 맞습니다만...”
“거봐. 얼마나 되냐? 몇 백 원이라도 되냐?”
농산은 더 설명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단정하고 말했다.
“중석 서방님과 관계가 없는 돈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서방님이 저에게 준 돈도 아닙니다.”
“무슨 소리냐? 준 것이면 준 것이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
“서방님이 10원을 꿔 주셨는데 그 돈은 갚았습니다.”
은실은 말이 빗나가기 시작하자 농산 큰 언니를 더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얼른 자초지종을 대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자세히 말해 보아라.”
농산은 그제서야 곡절이 있다고 생각하고 달래듯이 말했다.
“오늘 원대 경마장에 갔습니다. 서방님이 가자고 해서 따라 갔습니다.”
“경마장엘? 그거 노름하는 덴데...”
농산이 눈을 크게 떴다.
“저야 뭣도 모르고 그냥 따라 갔을 뿐이지요. 거기서 서방님이 돈 10원을 꿔주면서 한번 해보라기에 엉뚱한 말을 샀다가 횡재를 했습니다.”
“얼마를 땄기에 횡재라고 하느냐? 2, 3십 원 땄냐?”
“아뇨. 8천 6백 원도 더 땄어요.”
“아이구머니 이 일을 어쩌나.”
농산은 기겁을 했다. 은실은 돈을 따게 된 경위를 자세히 이야기 했다. 듣고 있던 농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그 큰돈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농산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은실은 지갑에서 기미시장 취인권을 내놓으면서 말했다.
“권번장님께서 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쓸 수 있게 해 주시면 더욱 좋겠구요. 워낙 큰돈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농산은 취인권을 받아 자세히 들여다 본 뒤 말했다.
“기미시장 쌀가마란 경우에 따라 크게 오를 때도 있지만 잘 못하면 몽땅 까먹을 수도 있는 도박이다. 내가 맡기는 하겠는데 까먹어도 원망은 말아라. 그 대신 더 벌어도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고맙습니다.”
“어쨌거나 네 처지에서는 벼락부자가 된 것이나 진배없다. 앞으로의 계획을 잘 세워 보아라.”
농산이 취인권을 방안의 금고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렇다. 이제 갓 출발한 아기 기생 은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이 아닌가. 기생 노릇해서 이 돈을 모으자면 얼마나 많은 곤욕과 수치를 견디는 참담한 세월이겠는가. 무엇보다 일본인 고관 자제들의 기생에 대한 성적 학대는 견디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선배 기생들로부터 수 없이 들었다.
여자의 몸에 있는 구멍이란 곳은 모두 그들 앞에 무방비 상태였다. 성 습관이 다른 그들은 조선 기생을 완전히 성 노리개로 삼았다.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것은 두 명 이상의 일본인 청소년들이 한 기생을 두고 집단적으로 성욕을 채우는 변태였다. 좁은 목욕통 안에서 물구나무를 서게하고 그 짓을 벌이며 히히덕거리는 광란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선배들은 몸서리쳤다. 은실은 문득 어릴적 경욱과 함께 고향에서 목격한 이웃 남녀의 대나무 숲 정사를 회상하며 미소 지었다.
종심이네 집 뒤의 대나무 숲을 지날때였다. 이웃집 유부남과 유부녀가 한데 어울려 벌건 엉덩이를 들어낸 채 정사에 열중하던 광경이 떠 올랐다. 몰래 숨어서 두 사람의 이상한 행동을 끝까지 지켜보며 그 황당한 짓이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 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아홉살이었어’
은실은 그때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11, 대나무 밭의 남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지만 그 때는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철없는 시절의 얼굴 붉히는 경험이었다.
은실과 경욱이 마을 앞 개울 어구에 있는 뽕나무 밭에서 오디를 싫건 따먹어 입술이 시퍼렇게 물이 든 채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 늦여름의 뉘엿한 태양이 열기를 뿜고 있던 대낮이었다. 은실의 집은 종심이네 앞을 지나서 가야 했다. 경욱은 이웃동네에 살지만 은실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가곤 했다.
은실과 경욱은 종심이네 집 대나무 밭으로 들어섰다. 대나무 밭을 가로지르는 것이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울창하여 약간은 음습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숲 한가운데로 들어섰을 때 어디서 여자의 신음소리 같은 것이 가느다랗게 들렸다. 대나무 숲에는 비오는 날 귀신이 잘 나온다고 할머니가 겁을 주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대낮인데다 경욱이와 둘이 있기 때문에 크게 겁이 나지는 않았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다가갔다. 은실은 경욱의 손을 꼭 쥐고 여차하면 달라붙을 기세로 한발 한발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 대나무가 유난히 빽빽하게 들어선 곳의 잎사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잎이들이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귀신이다!”
은실이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
경욱이 은실의 손을 잡고 숨을 죽인채 대나무 숲으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흔들리는 대나무 잎사귀 틈을 응시했다.
“사람이다.”
“응, 근데 옷을 벗었잖아."
경욱이 나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야. 남자하고 여잔데 둘이 싸우는 것 같아.”
“옷도 벗고 싸우는데?”
“아니야. 바지와 치마만 벗은 거야.”
은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남녀는 대나무숲속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마른 댓닢 위에서 서로 엉겨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남자는 바지를 발목에까지 내려 뻘건 엉덩이가 다 보였다. 그 밑에는 치마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여인이 두 팔로 위에 있는 남자를 껴안고 있었다.
“으으, 으으, 아이, 아으....”
남자가 움직일 때 마다 밑의 여자는 괴이한 신음 소리를 냈다. 두 남녀는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이상한 일에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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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