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기생 장은실 15
“제가 안 들어가면 아마 찾으러 나올 거예요.”
“너한테 못된 짓은 하지 않았단 말이지?”
은실은 못된 짓이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잘 몰라 대답대신 여자를 쳐다보았다.
“너 옷 벗기고 거기에... 아니...아저씨도 함께 벗고., 아니 네 위에 올라타고...”
은실은 정확한 표현을 못해 쩔쩔매는 여자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얼른 대답했다.
“사루마다(팬츠의 일본말)를 벗기려고 하기에 오줌 마렵다고 속이고 뒤쳐 나왔어요.”
그 때야 여자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구까지 무작정 가서 어떻게 하려고 하니?”
“ ... ”
은실은 대답을 못했다. 한참 만에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서형신이라고 한다. 그래, 공부가 하고 싶어서 무작정 가출을 했단 말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구나. 네가 꾀를 내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아주 일생을 망치게 될 뻔 했어.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 이리 따라 오너라.”
은실은 형신을 따라 옆방으로 갔다. 문에 노크를 한 뒤 형신은 무어라고 영어로 말을 했다.
문이 열리고 머리털이 노란 서양 여자가 나왔다. 눈이 파랗고 코가 너무 오뚝했다. 은실은 할머니가 늘 말하던 서양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비단으로 만든 두루마기처럼 생긴 옷을 몸에 휘감고 있었다. 그게 잠옷이라는 것을 은실이 알 턱이 없었다.
“선생님, 이 아이는 장은실이라고 합니다. 학교에 다니고 싶어 집을 나왔다고 합니다. 은실아 인사 올려.”
은실이 서양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마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서양 여자는 웃으면서 은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서형신 언니가 영어로 한참 설명을 했다. 아마도 은실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부마태(傅馬太)라고 해요. 잘 하셨어요. 여기서 자고 내일 나와 함께 대구로 가요.”
고개를 여러번 끄덕이며 형신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난 서양 여자가 은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서양귀신이라는 생각은 싹 사라지고 인자한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은실은 형신이와 함께 다시 작은 방으로 갔다.
“한국 이름이 부마태라서 좀 이상하지? 선생님은 미국 선교사 부인이신데 원래 이름은 마르타 브루엔이야.”
“일본 이름은 뭐예요?”
은실이 질문을 했다. 한국 성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던 소위 ‘창씨개명’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궁금한 것을 물어본 것이었다. ‘창씨’란 성을 새로 만들고 ‘개명’이란 이름을 바꾼다는 뜻이다. 대체로 한 자 뿐이던 한국 성씨를 일본식으로 두 자로 만들었다.
“미국 사람은 일본식 이름을 만들지 않아. 우리는 낮에 거창 장날이라 장터에 선교하러 갔다 오는 길이야. 내일 대구에 갈 텐데 거기 가서 어떻게 할지 선생님과 의논해보자. 선생님은 예수교 선교를 하면서 교회와 학교를 여러 개 세우셨거든.”
“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부엌일도 잘하고요, 설거지도 할 수 있어요. 저를 같이 있게 해주세요.”
은실은 사정을 하면 될 것 같아 무턱대고 같이 살게 해 달라고 졸랐다.
“선생님이 학교에 넣어줄지도 몰라.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예수도 잘 믿어야 한다.”
“예수가 누군데 믿어야 해요?”
은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질문을 많이 했다.
16. 기생방의 낯선 풍속
은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런 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서양 선생님이 세운 학교는 학생이 많은가요?”
“선생님이 세운 학교는 신명여자중학교라고 하는데 학생이 많지는 않아.”
“모두 여자아이들인가요?”
은실이 눈망울 또록또록 굴리면서 물었다.
“그럼. 모두 여학생이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도 있지만 공부보다는 빵이나 사탕을 얻어먹으려고 오는 학생도 있단다.”
“학교에서 먹을 것도 주나요?”
“학생들이 학교에 잘 오지 않으니까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맛있는 걸 주기도 한단다.”
“왜 학교에 오지 않으려고 해요?”
“참 궁금한 것도 많다.”
형신은 은실의 이마에 꿀밤을 한대 먹이면서 웃었다.
“여자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못쓰게 된다고 양반집 아버지들이 학교에 못 가게 한단다. 또 서양 귀신한테 홀려서 할아버지 제사도 지내지 않게 될까봐 어른들이 걱정을 한단다.”
은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만 갸웃거렸다.
형신이와 함께 고령의 가야 여관에서 새우잠으로 하룻밤을 새운 은실은 이튿날 아침 여관에서 차려준 아침밥을 형신이와 겸상하여 먹었다.
브루엔 선생은 가지고 다니는 빵에 서양꿀을 발라서 먹었다. 은실은 나중에야 그것이 잼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침을 먹고 출발 준비를 하던 브루엔 선생이 은실의 헤진 짚신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가다가 읍내 가게에 들러 고무신 한 켤레 사야겠다.”
브루엔 부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 사람은 운전사가 달린 자가용차를 함께 탔다. 미국서 가져온 차로 여관집 아저씨가 스타찡을 돌려 시동을 도왔다.
“은실이라고 했던가?”
조수석에 앉은 은실을 향해 뒷좌석의 브루엔 선생이 물었다.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예, 장은실입니다.”
“학교는 어디까지 다녔나요?”
은실은 어른이 아이인 자신을 보고 존대 말을 쓰는 것이 어색하게 들렸다.
“학교는 다니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훈장으로 있는 서당과 아버지께 한문을 배웠어요. 대학을 시작하다가 그만 두었어요.”
“서당에도 대학이 있어요?”
브루엔 선생이 눈이 둥그레져서 형신을 보고 물었다.
“호호호. 선생님, 서당에서 배우는 대학이란 대학교 즉 칼리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책 이름이어요.”
“하하하. 그래요? 그럼 조선말이나 일본말은 배우지 못했겠네요.”
브루엔 선생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조선말은 오빠한테서 배워 읽을 줄은 알아요. 일본글은 전혀 몰라요.”
일행이 탄 차가 신발가게 앞에 멎었다. 은실과 형신은 차에서 내려 까만 고무신 한 켤레를 신어 보았다. 눈짐작으로 고른 신발이 꼭 맞았다.
“꼭 맞는구나.”
형신이 돈을 치르려고 하자 은실이 고무신을 벗었다.
“왜? 안 맞아?”
“아뇨. 꼭 맞아요.”
“그런데?”
“너무 꼭 맞으면 오래신지 못하잖아요. 급방 발이 커질 텐데 좀 큰 것을 골라야 오래 신을 수 있지요.”
은실은 조금 헐렁한 고무신을 골라서 신었다. 차안에서 그 모양을 보고 있던 브루엔 선생이 빙긋이 웃었다.
그날 오후 일행은 대구에 도착했다.
은실은 대구 서부 지역에 있는 브루앤 선생의 교회로 갔다. 브루엔 선생은 부부가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교회와 학교를 여러 개 세우기도 하고 운영도 했다.
대구 서부지역은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반대로 대구의 남동 지역은 일본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일본군의 주둔지로, 일본인 거주지로 남동쪽이 많이 선택되었다.
서울도 비슷한 경향이었다. 서울의 남쪽인 남산이나, 더 남쪽인 용산에 일본군 주둔지나 신사가 세워졌다.
그러나 서부 서울은 선교사들이 학교나 교회, 병원을 많이 설립해서 서양문물의 관문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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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